2004-06-26 12:31:32

 

김선일씨의 죽음을 보고 분노하여 이에 대한 응징을 요구하며 파병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파병했다가 패전하고 되돌아 오면 어찌되는가? 그리하여 김선일씨와 같은 참혹한 죽음이 수 천명 늘어나면 어찌하려는가. 전쟁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승산을 타산하지 않는 전쟁이란 미친 짓이다. 파병을 하는 것이 과연 국익에 부합할까? 당신들은 이러한 사안들에 대한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보여줄 수 있는가? 없다면 파병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전쟁은 국민의 기분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로 인하여 국민들 간에는 파병반대와 파병철회로 국론이 갈려 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은 이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대한민국의 국익에 반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선일씨를 잔혹하게 살해한 집단들은 그들이 바라던 소기의 목적을 이미 달성하였는 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테러집단을 응징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최소한의 것, , <최후의 인간적인 죽음>,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의 악마적 사악함을 응징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 <최소한의 인간존엄>을 유지해야 하는 것에 더 우선하는 가치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어떠한 종교, 어떠한 철학, 어떠한 문화로도 변명할 수 없는 인류전체의 공통가치이다. 죽음이라는 결과적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당하는 과정의 문제다. 그 때가 될 때까지 테러집단으로부터의 최소한 <죽음에 대한 존엄성>은 지켜져야 되지 않겠는가?>를 말하면서 파병을 지지한다.

 

전쟁이 도통 무엇인지 모르는, 서구문화적 가치만이 보편적이고 절대적 가치라 여기는 문화적 편견에 사로잡힌 미국이나 유럽에 거주하는 재외동포의 발언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는 한 하늘아래 살 수 있는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란 이야기다. 만약 자신의 아들이 전쟁 터에 나아가 폭격으로 온 몸이 반쯤 찢겨져 날라가고, 몇 날 몇 일을 신음하고 비명지르다가 죽을 수 있다는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이런 말을 할 쉽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요망사항대로 세상이 움직여질 수 있다는 어이없는 착각과 무지가 이러한 감당 못할 발언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클라우제비쯔(Carl von Clausewitz)는 그의 <전쟁론, Vom Kriege>에서

전쟁이 본질적으로 잔혹해 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전쟁이란 우리의 적대자로 하여금 우리의 뜻을 완벽하게 이행하도록 강요하는 폭력행위이다. 폭력은 폭력에 대항해서 싸우기 위하여 발명해 낸 기술과 과학의 여러 가지 발명품으로 무장된다. 적으로 하여금 우리의 의지에 강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전쟁의 궁극적 목적이며, 적의 무장해제는 이론 상 전쟁행위의 당면한 목적이다.

 

인도주의자들은 엄청난 유혈사태를 벌이지 않고도, 적을 압도 정복하고, 무장해제를 할 수 있는 非常한 방법이 있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오류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한다. 전쟁과 같은 위험스러운 일에서는 자비정신에서 우러나오는 오류가 가장 위험하다. 전쟁에서는 무자비하게 힘을 사용하는 자가, 보다 소극적으로 힘을 사용하는 자보다 반드시 우월성을 확보하게 된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극한 상태로 발전 도달하게 된다. 전쟁에서 인도주의나 중용, 절제의 원칙을 설정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필요한 것이다. 전쟁이란 극한적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중지되지 않는 폭력행위이다. 전쟁이란 힘의 극대사용으로 치닫는 충돌사태이다. 적이 패배하지 않는다면, 적은 우리를 패배시킬 수 있다. 적은 우리가 적들에게 강요했던 것처럼 자기의 법을 우리에게 강요할 수 있다. >

 

전쟁이란 본질적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다.

 

인간은 戰場에서 짐승이 되어 살육을 한다. 나이프로 목을 자르는 것을 촬영하고, 적을 협박하여, 자신들이 덜 죽을 수 있다면 이는 전술적으로 효과적일 수도 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양민인 것이 구분이 안된다면, 닥치는대로 사살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데 효율적일 수 있다. 전투 중인 군인에게 정상적인 인간성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산업혁명 이후 지난 150년 간, 서구문화의 전 세계적 전파는 과거에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서구인들 배타적으로 만들고 다른 문화를 진지하게 받아 들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서구문화에 당당히 보편성을 부여하고, 이것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멈추게 되었으며, 서구인들이 믿는 보편성이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단히 생각하게 만들었다.

 

서구인들은, 백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업적 제도가 독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서구인의 업적과 제도는 자신들보다 못한 인종들과 다른 수준에 나온 것이므로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제국주의거나 인종주의적 편견이거나, 또는 기독교와 이교도 간의 비교의 문제이거나 간에, 서구인들은 아직도 우리 자신의 문화, 제도의 독자성에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 세계의 다른 어떤 문화와 제도의 독자성에 대하여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서구인은 이방인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이방인을 보았더라도 그 이방인은 이미 유럽화된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많은 곳을 여행했더라도 그는 서구적인 호텔에서 벗어난 곳에서 한 번도 머무르지 않고 세계를 돌아다녔기 십상이다. 그는 자신의 생활방식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전쟁이라는 것도 또 하나의 사회적 테마이다. 전쟁에 관하여, 서구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나라들도 세계 도처에 있다. 아즈텍문화에서 전쟁은 종교적 제물을 잡는 한 방법에 불과했다. 스페인인들은 살상을 목적으로 싸우는 사람이었으므로, 아즈텍인으로 볼 때, 그들은 게임의 규칙을 어긴 것이다. 그래서 아즈텍인들은 놀라서 패했고, 코르테스는 승자로 수도에 입성했다. 전쟁에서의 살육에 관하여서도 집단 간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 곳도 있다. 우리는 전쟁이란 어떤 부족과 관계를 가질 경우 평화 상태와 번갈아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평화상태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생각에 평화상태란 적대적 부족을 자기들과 같은 인간의 범주 안에 받아들이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의에 따르면, 그들이 배척하는 부족은 비록 자기들과 같은 세상에 산다고 할지라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이슬람권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러한 문화적 편견과,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시각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김선일씨의 죽음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또한 이러한 서구의 관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용기, 이타주의와 정신적 가치 등을 북돋아 주던 戰時 하의 논의들이 얼마나 허구인가 하는 것이 입증되었다. 전쟁은 인간이 얼마나 파괴적이고 잔혹할 수 있느냐를 끝없이 보여주는 실례라 할 것이다. 우리가 전쟁을 정당화한다면 모든 사람의 그 어떤 행위도 정당화할 수 있다.

 

현대의 생활은 많은 문화 간에 밀접하게 접촉하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적 속물근성이 압도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인종적 편견에는 문화적인 토대가 있음을 인식하는 일은 오늘날 서구문화에 절실히 요청되는 바이다. 우리의 문화가, 진실된 문화의식을 가진 개인, 즉 두려움과 비방 없이 다른 문화에서 살면서 사회적으로 조건지워진 다른 사람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개인이 지금보다 필요한 때는 없었다고 여겨진다.

 

상대방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을, 또는 상대방이 바라지 않는 일을 자신이 옳다고 하여 상대방에게 요구하거나, 자신의 판단으로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며 일을 행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일은 <상대방에 좋은 일이다>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독단이다. 그리고 자신의 독단으로 상대방에 연관된 행위를 하는 것은 마땅히 부도덕하다. 그것이 선행이라 할지라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도덕하다. 이러한 개인과 개인의 상호 존중의 정신은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문화에 대하여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담후세인의 독재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담후세인 독재를 제거하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라크에 심어놓기 위한 목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이러한 방식의 침략행위가 정당화된다면, 다른 나라가 인구의 10%가 마약에 찌들고, 자본주의의 타락 상의 백화점같은 미국을 침략한다는 것 또한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문화인류학자인 한 사람인 Ruth Benedict (1887-1948)

<문화의 패턴: Patterns of Cultu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구인이 서구인과 원시인, 서구인과 야만인, 기독교인과 이교도라는 식의 서구인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한 인류학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념을 우리와 다른 문화에서는 미신이라 보여지는 신념보다 우위에 두지 않는 세련된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러한 <문화인류학적> 관점이

야만과 폭력으로 치닫는 현대문명에 주는 교훈을 다시한번 되새겨 볼 때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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