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386 세대를 위하여

2004-10-14 17:00:59

 

 

대통령의 국가 보안법 폐지 발언이 나온 직 후, 한 일간지의 여론 조사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30대와 20대의 정당지지율이 열린우리당 30.0%, 32.3% 한나라당이 28.3%, 17.8% 민주노동당이 23.5%, 29.5%를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50대 이상의 경우 열린우리당이 18.6% 한나라당이 46.0% 민주노동당이 5.6%로의 지지률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여론 조사는 우리사회의 세대간 갈등의 극명함으로 보여준다. 나아가 우리 사회가 젊은 세대일수록 대한민국 체제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있지 않느냐는 심각한 우려를 느끼게 한다. 국가보안법 철폐와 미군철수를 대남적화통일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놓은 북한의 통일전략을 생각하면 이는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사회상황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최근 중앙일보에서 행한 386세대와 포스트 386 세대에 대한 기획기사를 읽고, 우리 사회가 사회주의화 하고 있다는 생각에 대한 우려를 씻을 수 있었다. 서울대 송호근 교수는 386세대와 포스트 386 세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386세대의 화두는 혁명이었다. 포스트386세대의 화두는 탐닉이다. 엑스터시 속으로 자신을 담그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혁명이다. 386세대의 가슴속에는 ''즐기는 자아''가 없었다. 포스트386세대는 386세대가 결여한 ''나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것이다. 포스트386세대는 잊었던 존재를 찾으려는 갈망으로 문화의 시대를 활짝 열었다. 풍요로운 시대는 반항아를 탄생시킨다. 문화적 이탈자들 말이다. 이념적 혁명가들이 하드웨어(정치 권력과 제도)를 공격한다면 문화적 이탈자들은 소프트웨어(인습. 규범. 관행)를 무너뜨린다.

 

탐닉은 자신을 혁신한다. 이들은 구태의연한 가족 규범을 조롱하고, 이혼을 주저하는 386세대의 우유부단함을 공격하고, 여성을 가정에 가두는 전통적 인습을 부쉈다. 기성세대의 정조 관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자유로운 섹스와 동거를 감행한다. 포스트386세대는 소비를 즐긴다. 문자세대와 영상세대의 격차는 인식의 공간을 달리 채색했고, 급기야 교신할 수 없을 만큼 세계관의 편차를 만들었다. 해방 이후 포스트386세대만큼 문화자본이 부유한 세대는 없다. 386세대의 인식공간에는 문자와 논리가 헤엄쳐 다닌다. 포스트386세대의 그것에는 영상과 이미지가 가득 차 있다. 포스트386세대가 이미지를 인화할 때 3S, 즉 감정 몰입(sympathy), 상징(symbol), 감성 (sentiment) 이 활용된다. 세대원 간의 상호교신에는 정서적 조응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반면 386세대에게는 3E, 경험(experience), 증거(evidence), 참여(engagement)가 중시된다.

 

경험의 공유가 있는지, 서로 통할 징표가 있는지, 그것에 참여했는지다. 혁명에는 공유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투옥 경력이 등용의 증거물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주체 형성과 호명의 방식이 다르다. 386세대에게는 논리에 대한 확신, 신념이 주체 형성의 핵심 요소였다. 이념의 호명은 자아발견이었으니까. 포스트386세대에게 호명은 감성교환과 감정몰입이다. 시위 참여에도 정서교환이 중요하다.

 

주체 호명의 방식은 민족주의의 개념을 바꿔 놓았다. 386세대에게 ''한국인의 조건''은 영토, 한국에서 삶의 경험, 한국 태생, 핏줄 등 생물학적 요소이지만 포스트386세대에게는 동감, 한국인임을 느끼는 것 등 감성적 요소가 대부분이다. 반미와 친북 성향이 높은 것도 이런 특성 때문이다. 이들은 미국이 전통적 우방이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은 아무리 흉악한 짓을 저질러도 같은 민족임을 ''느낄 수 있다''. 포스트386세대는 반미의 기원인 386세대보다 훨씬 반미적인데, 미국 호감도를 뭉텅 떼어 내 북한과 일본에 각각 할애했다. 주사파적 감성이 이들에게서 증폭된다.

 

두 세대는 ''어제의 동지''가 아니다. 포스트386세대는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 문화 투쟁을 일으킨다. 그 상대는 힘없이 주저앉은 기성세대가 아니라 아직 힘을 쓰는, 그러나 기성세대화해 가는 386세대다. 386세대는 혁명을 완수하자마자 혁명의 대상이 됐다. 문화투쟁에서 386세대는 패배할 것이다. 문화자본이 빈약하고, 상상력의 공간을 점령하는 영상문화의 대군(大軍)을 감당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자아혁신이 문화투쟁의 목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감미로운 탐닉. 흥분. 감동을 분출해내는 영상시대의 총아들 앞에서 한국사회를 지탱해왔던 구태의연한 규범. 인습. 관행. 권위는 무릎을 꿇을 것이다. 이제 3S로 무장한 그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 >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이해를 도우려는 의도로 내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가 그들이 제대로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현 집권세력이 과거 기득권층을 때려부수는 데에 대한 지지라고 하는 것이 보다 올바른 평가인 듯 싶다. 현 집권세력을 주도하고 있는 386세대는 제대로 일을 하고, 생산적인 건설을 해 보지 않은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적 국가질서나 사회질서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아닌 군사독재의 반민주주의적 사회질서에 대하여 항거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 지상의 목표라 실천해 왔다 . 민중해방을 위한 반파쇼 민주화 운동과 민족 해방을 위한 반미자주화 운동의 기치아래 기득권층의 불공정하고 부당한 기득권을 파괴하고 빼앗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때론 주체사상을 지지해오며 민주화 운동을 해 온 사람이 상당수인 세대가 386 세대이다. 현 정권의 실세인 386세대가 지금도 주체사상을 신봉할까? 현 정권을 빨갱이 정권으로 여기고 싶은 보수층의 견해는 현실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 정권의 주요 관심은 기득권층으로부터 기득권을 가능한한 많이 빼앗고 자신들이 기득권을 보다 많이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보다 적당한 표현이 아닐까?

 

5.18 광주 항쟁 이 후, 그리고 서울과 부산의 미문화원 점거방화 사건 이 후, 우리 사회에 주체사상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해찬 국무총리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중형을 선고 받았던 시기이다. 광주항쟁에서 876.10 민주화 운동에 이르며 성장해 온 세대가 386세대이다. 이들이 반미적이고, 반 기득권층의 정서를 가졌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을 통째로 들어 북한에 바치려 한다는 식의 비유는 적절치 못하다. 386세대의 의식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이 흐른다. 하지만 386세대는 집권하자 마자,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것을 재빨리 간파한다. 현 정권이 생각하는 과거사 청산이나 사립학교법 개정, 언론개혁 등은 집권세력의 권력 강화의 선 상에 놓여있다. 그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닌 권력이다. 문제는 386세대가 권력을 잡자마자 타락한 권력으로 전락했다는 데에 있다. 그들에게 이제 이념은 버려아 할 것이고, 제대로 일해본 적이 없으니 능력이 턱없이 모자란다. 앞서 송교수가 분석한 것처럼 386세대는 그들의 혁명을 완수하자마자 혁명의 대상이 되어버린 세대이다. 노무현 정권과 386세대의 치명적 취약점은 우리사회가 공유하여야 할 공동의 소신과 가치를 담고 있는 구체적 국가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들의 권력의 확장을 위한 기득권층 때려부수기가 전부인 것처럼 보여진다. 386세대의 필연적 몰락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그들은 태생적 한계 - 파괴할 줄 만 알고 건설할 줄 모르는 문화적 不妊성에서 기초한다.

 

우리가 만약 노무현 정권에 절망한다면, 혹은 비판적으로 지지한다면 우리는 포스트 노무현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새롭게 열어갈 포스트 노무현 시대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박정희만세를 외치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 만연된 박정희 신드름은 퇴행적이며 국가발전에 반동적인 병리현상이다. 인간 존중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와 사회를 건설해야할 우리 시대에 있어, 박정희 신드롬은 결코 확산되어서는 아니될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노무현 다음의 우리의 미래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제도화하고 구체화하여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자유민주의 이념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민주적 헌정질서를 구축하고 잘못된 제도를 정비하여 국가의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한다. 나아가, 건전한 경쟁질서를 갖는 그리하여 활력적인 경제 흐름을 갖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과거 특혜적 지원 속에서 성장한 우리 기업이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 귀결이다. 경제 살리기를 말하며 기업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정부가 기업활동을 지원해야 한다 말한다.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은 건전한 경제질서를 갖는 시장질서에 기초해서 발전한 것이 아니다. 국가의 지원하에 특혜적 지원을 받은 기업집단에 의해서 발전하였고, 그러하였기에 자생적인 경쟁력을 향상시키지 못하여, 세계화의 무한경쟁시대에서 못하고 허우적 되며 갈팡질팡하는 것이 우리 경제가 1만불 벾을 깨지 못하고 답보하는 보다 근본적 이유가 아닐까. 물론 개혁이란 이름 하에 진행되는 정치적 상황의 가변성이 사회의 안정을 깨뜨리고, 안정성이 결여된 사회에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경제가 어려운 것 또한 노무현 정부 이후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 중요한 이유이다.

 

앞서 포스트 386세대를 분석한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이들이 자유주의체제를 거부하고 사회주의의 체제를 선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또 이들이 갖는 친북 반미의 정서라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20, 포스트 386 세대는 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하다. 고도화된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의 성원들의 공통된 특징은 정치적 무관심과 소비지향, 여가지향, 승진지향, 사생활지향적이다. 포스트386세대가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이나 이념이 아닌, 기존 질서 해체적 인 성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포스트 386세대의 특징은 철저하게 자유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이다. 이들을 친북세력이니 빨갱이로 매도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라 여긴다. 정치지도자의 역할은 포스트 386세대가 가진 성향을 어떻게 하면 국가발전의 에너지로 이끌어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대한민국에 제대로 된 자유민주의 질서를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주의 삶의 질서와 자율적이며 개인의 자발성이 존중되는 자유주의적 삶의 질서를 확대해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제대로 된 자유주의이념을 학습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자유주의 이념이란, 인간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그 누구나 개성과 자존심이 존중되어야 하며, 인간은 수단이 아닌 인간 자체가 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여야 한다 믿는다. 소수의 의견이 존중되고 독단과 편견이 배척되며, 불공정과 특권에 대한 집착이 없는 공정한 룰에 의하여 운영되는 사회로의 진화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세계이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진화는 그 무엇보다 사회 성원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진화에 의존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의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진화가 사회 발전의 요체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는 국민들이 알기 쉽게 예측가능하고 투명하게 국가 권력이 행사되도록 하여야 한다. 경제는 자유경쟁의 건전한 시장질서가 확립되어야 한다. 법적 안정성과 나아가 건전한 상거래의 관습이 정착되고, 경제 주체들 간에 신뢰가 쌓여져 가는 건전한 경쟁질서를 확립함으로써 경제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시장의 활력을 극대화 하여야 할 것이다.

 

흔히들, 구 소련의 붕괴, 동구권의 붕괴를 두고,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 승리라 말한다. 나는 이러한 표현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공산권의 몰락은 전체주의와 계획경제에 대한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라 믿는다.

 

자유주의와 시장 경제의 강점은 어디에 있을까? 자유주의 정치이념은 국가권력의 타락을 방지하고 국가권력의 행사를 적법절차(due process of law)에 따르도록 하여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지속할 수 있었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경제가 1930년 세계대공황 이후 유산자가 무산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모순 점을 극복하고 시장에서 경제권력이 시장을 조작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건전한 경쟁질서를 확립하고, 생산수단의 흐름을 보다 유연하고 원활하게한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오늘날의 번영이 가능했었던 것이다. 자유주의 이념의 우수성은 정치나 경제 사회 문화에서 과정(Process)을 최적화하여 국가나 사회의 활력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하며, 세상을 놀라게 한 힘의 최선봉에 포스트386세대가 있다. 나는 우리나라에 자유주의적 국가질서를 확립해 나아감으로써, 이러한 역동적이고 활력적인 국민적 에너지를, 새로운 역사적 도약을 위한 국가발전의 에너지로 결집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정체성의 확립은 자율적이고 창의적의 문화적 역량의 모태가 된다. 지식정보화 시대이다. 미래의 국가는 무엇보다 그 국가가 갖는 문화적 역량이 그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믿는다. 문화는 사회를 보호한다. 문화는 각종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평가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오늘의 포스트 386세의 모습은, 그들에게 수구꼴통이란 비난을 듣는 기성세대가 길러낸 산물과 다름 아니다. 경제성장이란 이름으로 표절과 위선과 힘있는 자에게, 부패한 권력과 부패한 규범에 굴종하며 살아왔던 기성세대가, 남의 눈치보지 말고 기죽지 말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라고 가르친 까닭에, 오늘의 젊은 세대가 그렇다. 개성과 자존심이 강하고 모든 일은 자발성에 기초하여 행하려는 젊은 세대로부터 나는 보다 발전되고 새로운 역사적 도약을 일구어낼 미래를 읽을 수 있다. 갈 사람은 가야 한다. 기성세대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 문명사적 변혁의 시기에 적응할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나는 직감할 수 있다. 지금의 보수기득권층은 역사에서 물러나고, 포스트386세대가 우리 나라의 주역으로 성장할 때, 우리에게 반드시 밝고 희망찬 내일이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가치관의 혼란과 취업난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젊은 이들에게 아낌없는 응원을 보낸다. 삶이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내리막이 다 하면 평탄해진다는 것을, 진정 역경과 시련을 견디어낸 자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내 아버지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들에게 아낌없는 애정과 사랑을 보낸다

이해찬 총리에 기대하는 사회학적 상상력

2004-11-09 11:30:11

 

지금 내 책상 위에 미국의 사회학자 밀즈(C.W. Mills)가 쓴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책의 번역서가 놓여져 있다. 1978년에 발간된 이 책의 번역자는 강희경, 이해찬으로 되어있고, 역자에 관하여, 똑같이 1952년생인 두 사람 중 강희경씨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 이해찬씨는 서울대 사회학과 修學으로 적혀있다. 이해찬 총리가 26세 때 번역한 책이다. 이총리의 젊은 날의 시련의 삶과 민주화운동의 치열성 학문적 성실성을 엿볼 수 있다. 이총리는 1971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 입학, 1972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입학, 1974 ~ 1975, 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 1980 ~ 1982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 되고 1985. 8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다. 그에게 대학졸업장을 받기 위해서 15년 간의 고난의 세월이 필요했었다.

 

 

 

밀즈(C.W. Mills)는 한 개인의 삶과 한 사회의 역사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이해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말하고 있다. 나아가 어떠한 사회 현상이나 개인의 행동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개인의 일생(biography)과 역사(history) 그리고 개인과 역사의 상호 작용을 이해하는 정신적 자질이 필요하다 말하며 이러한 정신적 자질을 일컬어 사회학적 상상력이라 말하고 있다.

 

 

 

지식정보화 시대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같이 엄청난 량으로 쏟아지는 정보는 우리가 그 정보를 소화할 능력을 압도한다. 정보화시대의 경쟁력은 필요한 정보를 선택하고 이를 분석, 종합, 가공하여 어떻게 우리들의 삶에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정치가, 경제인, 저널리스트, 학자, 과학자, 예술가, 문화인 그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들 모두에게, 정보화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정보를 분석 종합 가공하는 사고력일 것이다. 나아가 수집 가공된 정보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사고를 발전시킬 수 있게 해주는 정신적 자질을 요구한다. 밀즈(C.W. Mills)는 이러한 정신적 자질을 사회학적 상상력이라 설명한다. 한 개인에 대한 이해는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회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는 그 사회의 성원인 한 개인의 구체적 삶으로부터 설명될 수 있을 때 온당하다.

 

 

 

부당한 현실을 거부하고 반항하며 투쟁하는 정신은 평가 받아 마땅하다. 어떠한 사람의 특정한 몇 몇의 행동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실패나 오류는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실패에 이르기까지의 정당한 노력조차 폄하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실적위주로 이끌려지는 사회에서는 실패한 사람들의 정당한 노력에 대한 평가가 소홀하다. 다양성이 배제되고 흑백논리에 이끌려지는 사회에서 개성적이고 창조적 인간이 성장하기 어렵다. 실적위주로 개인의 삶을 평가하고 승자와 패자로 극명하게 명암이 엇갈리는 사회는 획일성과 능률과 업적만이 강조된다. 이러한 사회의 경직성은,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기필코 성취해내고야 마는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사회발전의 동력을 스스로 배척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부당한 현실을 거부하고 반항하며 투쟁하는 정신은 투쟁의 대상의 욕망에 종속되기 쉽다. 독재권력과 투쟁하였던 이총리의 민주투사의 경력은 이총리가 기득권층에 대하여 적대적 증오심을 가지고 성장하여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총리의 민주화 투쟁의 경력은 그의 성장과정에서 독단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공격적이고 세련되지 못한 이총리의 언행은 그의 경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해찬총리 개인의 일생(biography) 과 군사독재의 암울한 역사(history)를 되돌아보면, 최근 이총리의 총리답지 못한 언행에 대하여 이해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총리의 개인적 과거사가 총리로써의 품위를 손상시킨 언행과 야당에 대한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과거는 과거이다. 국무총리로서의 직책의 막중함을 생각할 때, 그의 말은 경솔하다 비난 받아 마땅하며, 직분에 걸맞지 않은 언론과 야당에 대한 감정적 대응은 그의 정서적 미숙함과 세련되지 못한 매너를 드러내 보여 줄 뿐이다.

 

 

 

이해찬총리의 언론에 대한 막말, 그리고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역사가 퇴보한다는 발언, 여권의 헌재판결로 인한 수도이전의 좌절 등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지금 국회는 파행 국면을 맞고 있다.

 

 

 

집권당은 개혁만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며, 4대 개혁입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야당은 경제를 살리는 것이 국정의 최우선 과제라 말하며 오히려 개혁입법의 부당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야당에서는 이총리의 사과와 파면을 요구하고 있다. 박근혜대표는 1029일 이해찬국무총리의 지난 28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 과정에서 나온 한나라당 폄하 발언 등에 대해 "의회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며 강하게 반발하여 "여권의 4대 법안 강행처리 때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런 것을 포함해 몸으로라도 막을 수 밖에 없다""당의 명운, 나아가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지난 27일 박근혜 대표는 국회연설에서 현 정권의 개혁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국민들은 두 편으로 갈렸고, 극렬한 편 가르기의 폭풍우 속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쓰라린 증오의 상처밖에 없습니다. 국가를 발전시키지도 못했고, 경제를 살리지도 못했고, 국론을 모으지도 못했습니다.> 백번 옳은 말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현 정권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한다. 한나라당과 수구꼴통이 현 정권을 빨갱이로 몰고, 국론을 분열시켰기에 아무 것도 제대로 못하겠다 변명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라 할 것이다. 성공하지 못할 개혁이라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제대로 한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책임자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국정의 총체적 상황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이다.

 

 

 

탄핵 후, 복직 이 후 노대통령은 네트워킹에 의한 참여의 정치를 강조하고, 상생과 화해, 대화와 타협을 말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자세는 채 2주도 지키지 못하고, 온 국민이 노사모되는 독단적인 개혁, 심지어 수도이전에 대한 반대의 논의조차 자신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며 전횡적으로 정국을 이끌어 왔다. 노대통령과 집권당의 생각에는 국론을 분열시켜 있는 자와 없는 자를 편가르기 하여 4.15총선에서 빛나는(?) 승리를 쟁취한 것 같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대통령은 스스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업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눈 앞의 권력기반의 확장에만 급급하여 나라를 둘로 쪼개버렸다. 의회의 권력을 장악하면, 마음대로 법을 만들 수 있고 그리하면 뜻대로 수월하게 대통령 노릇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면 한시라도 빨리 스스로 잘못을 깨닫기 바란다. 한나라당이 목을 잡고 헌법재판소가 악의적으로 발목을 잡았다고 생각하면 아니될 것이다.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법이라면 법 자체가 규범력을 온전하게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독단적인 밀어붙이기 방식으로는 결코 대통령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自業自得이란 말이 있다. 지은 대로 받는 것이 세상사는 이치이다. 대한민국 국민 우리 모두의 대통령이 아닌 지지자들- 그들만의 대통령이 되어버린 노대통령의 앞날이 결코 순탄할 수 없는 것은 노대통령 스스로 자초한 스스로의 업보이다. 지금부터라도 노대통령 스스로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남을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스스로를 다스려 한다는 진실을 깨닫기 바란다. 대통령부터 솔선하여 법을 준수하고, 개혁입법은 반드시 합헌적 질서의 테두리에서 만들며,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어 국민적 지지를 기반을 만들어 가야만 성공적인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시대에 가장 절실하게 고갈된 자원이란 <사회적 연대성>의 이념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처한 국가 위기상황이 오직 노대통령의 잘못된 개혁에서 기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 지난 40여 년간 마치 종양처럼 자라온 사회경제적 구조적 모순, 사회구조적 부조리, 그리고 지난 17년간 당파적 이해에 얽혀 진행되어온 그릇된 방식의 민주화 개혁이 지금의 체제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 개혁은 회피할 수 없는 우리의 생존전략이다. 우리사회의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없이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한나라당이나 박근혜대표의 상황인식이란 우리가 처한 국가적 문제의 본질-개발독재가 가져온 사회경제적 구조적 모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경제 살리기가 우리 사회의 최우선 과제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접근 방식으로는 결코 경제가 살아나지 못한다. 불신과 반목, 대립과 갈등, 법과 원칙이 무너진 사회에서 경제적 접근으로는 경제조차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현 정권의 개혁 또한 문제적 현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제적 사회상황을 타파하는 것이 전부인 양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부조리한 우리 사회에 대하여 사회역사적 이해와 문제적 현실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와 현실적 고려 없이 당위성과 당파성에 집착하여, 성급하고 허술하게 진행된 현 정권의 무모한 개혁으로 우리의 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집권당의 개혁은 그야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다. 자신들의 요망사항만으로 성공적인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반면 실패하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무모하게 시도한다. 문제적 현실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량과 적절한 방법이 착실하게 준비되어 있지 못한 개혁이 성공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뭉치면 살고 싸우면 우리 모두 공멸한다. 증오심과 적개심으로는 결단코 개혁을 성공할 수 없다. 상호존중과 대화와 협력 나아가 건전한 국가질서- 민주주의적 헌정질서와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질서 나아가 인간존중에 기초한 상호 협력적 사회- 의사소통이 자유롭고 활력 있는 국가와 사회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이 개혁의 최우선 과제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나는 현 정권과 이해찬총리에게 보다 폭넓고 창의적인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길 기대한다. 밀즈(C.W. Mills)<사회학적 상상력>을 소유한 사람만 역사적 국면에서, 다양한 개인의 내면생활과 외적인 사회적 제도적 생의 의미를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다 말한다. 개혁의 성패 여부는 개혁의지에 보편적 설득력을 확장하는 데에 달려 있다. 보수기득권 세력의 사고의 경직성이 개혁의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개혁의 성공여부는 전적으로 집권당의 책임이며 그 어떠한 변명으로 개혁의 실패에 대한 면책사유가 될 수 없음을 자각해야 한다. 성공적 개혁은 반대자들의 마음 속에서 개혁에 동참할 의사를 발굴해 내고, 나아가 국민적 지지기반을 넓혀 가는데 있다.

 

 

 

개인은 자기 자신의 삶의 위상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이해하게 될 때, 자신의 경험을 보다 보편적인 지식으로 만들 수 있고, 보다 성공적인 삶의 기획이 가능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를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포착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미래를 보다 성공적으로 만들어간다.

 

 

 

자신만이 옳고 객관적이라 주장하는 것은 정신적 미숙을 토로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자유주의적 삶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 타인과 세계에 대한 개방성에서 찾을 수 있다. 지적 정직성은 자신의 주장의 한계를 이해하고 포기할 조건을 아는데 있다. 자신의 주장이 절대적이지 않고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개방적인 정신은 항상 학습할 수 있다. 반성은 때로는 열등감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하지만 인간은 반성적 성찰을 통하여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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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지식에서 나온다

2006-05-02 13:22:48

 

- 조인스 닷컴에 기대한다.

 

 

 

1. 중앙일보에서 조인스 닷컴으로 진화

2. 권력은 지식에서 나온다.

3. 조인스 닷컴의 발전전략

4. 콘텐츠의 가공방식-디국의 역할과 가능성

5. 맺는 말-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

 

 

1. 중앙일보에서 조인스 닷컴으로 진화

 

<사람을 받든다> <사회를 밝힌다> <세계를 향한다> <미래를 밝힌다.>는 중앙일보의 길을 읽어보았고 그 의미를 새겨보았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존중의 이념에 기초하여 품위 있는 삶을 지향하는 매체, 가치있는 정보를 신속 정확 깊이있게 제공하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중앙일보,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통한, 우리사회와 국가의 진로, 21세기 신문명의 흐름을 집어내고 이에 상응하는 문화적 역할을 자임하는 중앙일보 길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합니다.

 

정보가 힘이되고 돈이되는 시대라 밝히며, 미디어와 통신의 융합이 진행되고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고 유익함> 정보를 <공정>하고 <신속, 정확> 하게 공급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조인스 닷컴(JMN)JoongAng Online Information and News Service가 진화하여 Media Network를 포함하는 매체를 발돋음하였습니다.

 

조인스 닷컴은 발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해결해야 할 다음의 몇 가지 문제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운영철학에 대하여 마음 터놓고 대화하여, 힘을 합쳐 나아가는 컨센서스를 만들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급변하는 온라인 미디어 시장에서, 취약한 닷컴사의 수익구조를 개선하는 전략으로 콘텐츠 가공을 통한 정보마켓팅 회사로의 발전 전략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콘텐츠의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와 관련 주간지 월간지들을 융합하는 문제에 대한 연구를 하며,

오프라인 편집국에서 주장하는 공익성과 그룹전체에서 보는 사업성을 조화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사업성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편집국과 온라인 간의 통합을 모색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2. 권력은 지식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의 발전방향과 조인스 닷컴의 운영철학을 보다 보다 확고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혁신적인 테제를 제시하려 합니다.

 

Knowledge is Power.

영국의 법률가이며 정치가이고 철학자이며 대문장가인 F. Bacon의 말입니다.

나는 이를 <권력은 지식에서 나온다>로 해석합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서 인터넷 미디어 산업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하기 위한 핵심적인 철학과 경영이념은 나아가 사회나 국가와 사회의 발전전략의 키워드는 <권력은 지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실한 철학으로 이해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정보는 정보일 뿐입니다. 유익할 수도 유해할 수도 있는 것이 정보입니다.

 

어떠한 가치관에 기초한 가공된 콘텐츠가 지식입니다. 미디어 산업의 본질은 정보를 지식으로 가공 유통 판매하는 사업입니다. 지식의 가치는,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신뢰할 수 있는 지식으로 만드는 가공능력으로 결정됩니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미디어 사업의 발전과 사회발전은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를서 통하여 결정됩니다. 조인스 닷컴은 국내 최고의 네트워킹을 위한 인프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인스 닷컴을 발전을 제약하는 장애요인 무엇입니까?

 

이에 대하여 조인스 닷컴 하지윤 대표는 이에 대하여, <오프라인 편집국 시각과 그룹전체의 시각 차이는 영원한 숙제라 말했습니다.> 이 시각 차이를 허무는 것이 조인스 닷컴이 성공하는 핵심적 문제라 생각합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하대표가 말한 <영원한 숙제>란 생각처럼 심각한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지식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앙일보의 길> 밝힌 독자와 국민의 편에서 권력에 과감히 맞설 것이라는 생각을 과감히 버리고 보다 발전적인 사고로 우리사회가 진화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지식정보화시대에서 조인스 닷컴은 권력을 추구하여 품위있는 정론지가 되고, 이윤을 추구하여 세계적인 브랜드를 만들면 됩니다. 권력을 추구하면 브랜드 가치가 올라가고, 회사 이윤을 극대화 하면 조인스 닷컴을 이용하는 소비자의 이익이 극대화 될 것입니다.

 

산업사회에서는 정치시스템, 경제시스템, 사회문화시스템 중에서 정치시스템이 가장 상부구조에서 경제시스템이나 사회문화시스템을 조정하고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역할을 주도합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고급화될수록 지식에 의존하여야 하는 것이 지식정보화 사회입니다. 부분적으로 사회 문화시스템이 정치 시스템보다 상부구조 바뀔 것입니다. 지식과 문화가 정치 경제 사회를 향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은 모든 국민을 위하여, 정치발전을 위하여 정치권력이 사회정의와 보편적 진리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정당한 권력이 되기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급변하는 사회상황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힘의 유지 및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지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이란, 이제껏 일반인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권력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권력은 사회와 국가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는 힘이며,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발전의 동력이 되는 힘입니다. 권력은 윤리를 만드는 힘이여, 동시에 인간해방의 수단입니다. 권력은 권력자의 욕망을 총족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회의 건전성을 육성, 발전시키는 권력입니다.

 

문화는 사회를 보호하고, 사회성원들에게 새로운 동기를 부여합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은 필연적으로 지식에 기초한 문화권력이 될 것이고, 권력은 진화된 매체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권력은 비판적이며 반성적 지성에 기초해야합니다.

 

세상은 지식을 가진 자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와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지식이 지배해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고급화된 가공된 지식이 가장 가치있는 지식이 될 것입니다.

 

권력은 지식에서 나옵니다. 지식이 곧 권력입니다.

 

 

 

3.조인스 닷컴의 발전전략

 

정치권력이 권력을 얻는 방법이나 경제권력이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사고가 요구됩니다. 미디어 사업처럼 마케팅에서의 전략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사업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자의 이익을 극대화할 때, 기업의 이윤은 극대화된다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원칙이고, 이 원칙이 가장 교과서적으로 들어맞는 사업이 미디어 사업이라 생각합니다. 미디어 산업은 가장 공익적일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고, 소비자에게 가장 커다란 만족과 효용을 제공할 때 기업의 이윤은 극대화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면 <오프라인 편집국과 온라인> 간의 이견과 갈등은 저절로 해소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실질적으로 성취하기 위하여 전략적 사고를 필요로 합니다.

 

공익과 사회발전에 기여하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가 되고, 동시에 소비자의 만족과 효용을 극대화하여 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을 어떻게 수립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전략적 사고란 어떠한 문제를 다차원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략적 지도력은 어떠한 사안을 다차원에서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어떠한 목표를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중요한 문제, 긴급한 문제, 실질적 성과 등을 균형 있게 판단하고, 이러한 판단을 바탕으로 작업 수행의 우선 순위를 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인스 닷컴은 <중앙일보의 길>이 추구하는 정신과, 소비자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을 통하여 조인스 닷컴을 세계적 브랜드 벨류를 갖는 회사로 가꾸어 가야한다 생각합니다. 이를 위하여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사안으로부터 기존의 포탈 사이트와 차별화하여 새로운 미디어 사업을 주도하는 회사로 발전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공익성을 추구하여 우리사회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영향력 있는 매체가 되고, 동시에 소비자의 만족을 극대화 하여 기업의 이윤을 창출하는 것은 전혀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조인스 닷컴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국내 최고의 인적 물적 인프라를 가지고 있고,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를 갖는 세계최고 수준 회사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조인스 닷컴이 발전을 위한 몇가지 의견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지금 조인스 닷컴을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너무 다양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통합하여,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 미디어매체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 생각합니다. 문제의 어려움은 각 매체마다 매체별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고, 그 나름의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하나나 하나 매체를 놓고 평가하면 그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인스 닷컴을 발전을 위해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정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 조인스 닷컴의 운영철학이 무엇인가 최우선적으로 확고하게 확립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조인스 닷컴이 성공하면 기존의 매체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조인스 닷컴의 초기화면 이제껏 제작되어온 각종 잡지들이 이름이 있습니다. 원론적이 주장으로 이 모든 이름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 생각입니다. 조인스 닷컴은 컴퓨터로 비교하면 포맷하고 운영체제 인스톨하고 운영체제에 작동원리에 입각하여 프로그램을 인스톨하고, 유저인터페이스로서의 가장 사용하기 편리한 디렉토리를 구축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조인스 닷컴이 다루는 정보를 주제별 카테고리를 확실하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정치 시민사회, 경제 재테크, 웰빙, 문화예술 오락, 교육 강좌, 쇼핑등을 분류하고, 이에 맞춘 광고를 배치위치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매체의 통합 원칙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확립된 카테고리에 연관성 있는 콘텐츠만을 선택적으로 기존의 주간지나 월간지로부터 가져오고, 그 성공여부를 효과를 기초로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편집방향을 접근시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조인스 닷컴의 통합성을 해치는 요소는 배제하고, 방향성을 확립해 나아가면서 기존은 매체들이 조인스 닷컷을 콘텐츠를 지원하는 하위 콘텐츠로 발전해야 합니다. 상위 디렉토리에서는 사람을 끌어 모으고, 하위 콘텐츠로 갈수록 고급화 해야 합니다

.

조인스 닷컴이 정론지로써의 역할을 담담하려 한다면, 초기화면이 편집과 구성이 기존의 포탈처럼 젊은 이 들이 오락을 위한 상업주의적인 방식의 편집이어서는 아니되고 중일보의 품위와 손상시켜서는 결코 아니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실험적으로 시도하면서 독자등의 반응과 시너지 효과를 등을 고려하여 보다 진화된 매체로의 발전의 원칙을 확립하여야 합니다. 매체의 통합원칙은 경직된 원칙이어서는 아니됩니다. 상황의 변화에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업그래이드 원칙을 학립해야 합니다.

 

 

 

4 콘텐츠의 가공방식 - 디국의 역할과 가능성

 

조인스 닷컴이 이제 막 출범했습니다.

조인스 닷컴은 초기 메뉴 상단에 뉴스, 핫이슈 토론, 탐사기획있고, 바로 위 부분에 인기 검색어 표시하고 검색 창이 있습니다. 뉴스는 단순한 정보입니다. 이를 핫이슈 토론을 거쳐서 탐사기획 기사로 만들어가는 것이 콘텐츠를 재가공하는 프로세스가 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정보를 가공한다는 것은 그 정보의 의의와 가치와 우리들의 삶과의 관련성 속에서 보다 입체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정보의 가공할 때, 정보의 성격에 따라 가공방식을 차별화해야 합니다.

 

첫째, 사실의 보도가 가치있는 정보는 정보의 현장성과 입체감을 고려하여 정보를 만들어야 합니다.

 

둘째, 어떠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그 정보와 다른 연관성을 강조해야 하는 정보가 있습니다. 이는 하이퍼텍스트와 관련기사를 보여줌으로써 가능합니다.

 

셋째, 어떤 기사에 대한 특히 핫이슈 토론에 대한 많은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도록 해야 합니다. 디지털 국회는 이제껏 여론을 수렴하는 여타의 다른 그 어떠한 매체보다 네티즌의 의견을 수렴하고, 건전한 공론장으로써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데에 있어 성공적 있었다 생각합니다.

 

최근 디지털 국회 뿐 아니라 정치관련 사이트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식상해 하고 있습니다. 어떤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 대하여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사실에 대한 균형잡힌 의견을 피력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파를 위해, 반대파들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적대적으로 대응하면서, 저질 욕설과 인터넷 상에서 글쓰는 사람에 대한 모욕과 명예훼손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욕설이 근절되어야 합니다. 욕설이 근절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가운데, 특정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비곡직과 찬반토론이 활성화 되어야 합니다.

 

필자는 디지털 국회가 이러한 기존의 편집자의 기획만으로 만들어졌던 일방적인 매체가 아닌, 편집자와 디국에 글을 쓰는 모든 이들, 모든 독자들이 참여하여, 건전한 여론을 형성해 가는 공론장의 전범(典範)을 만들어 가기를 기대합니다. 필자는 디지털 국회에 그 누구보다 애정을 가지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글쓰기를 해왔다 자부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언론문화와 정치문화가 네티즌에 의하여 업그래이드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디국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글쓰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된 것은 우리나라 그 어느 매체보다 디국이 개방화된 건전한 공론장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의 사회발전은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를 통하여 달성됩니다. 중앙디국이 구호만이 아닌 명실상부하게 <네티즌이 만드는 Upgrade Korea>를 성취하기를 기대합니다.

 

지식정보화 시대에서 해설이나 평론기사가 강조되는 시대라 생각합니다. 핫이슈에 대하여, 이에 대한 해설기사를 각계의 전문가들이 디지털 국회에 글을 쓰는 유인책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말하는 네임밸류를 가지고 정치사회에 대한 해설이나 평론이 된자에게 먹혀들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신문 사설이 뒷면으로 밀려나고, 과거에 영광(?)을 누렸던 수많은 논객들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습니다. 오직, 어떠한 문제를 바라보는 독자의 시각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가치있는 기사만 살아남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가치있는 기사들은 조인스 닷컴에 참여하는 주간지나 일간지에 게재되도록 해야 합니다. 가치 잇는 기사들을 쓴 필자에게는 기사의 가치에 상당하는 소정의 고료가 지금되어야 하고, 가치있는 기사가 주간지나 월간에 게재되도록 결정되면, 그러한 기사는 독자들에게 마땅히 유료로 공급되어야 합니다.

 

이는 디지털 국회의 발전과 조인스 닷컴의 발전과 함게 시너지 효과를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종이신문,주간지나 월간지에 게재되는 기사가 기사화 되기 전에 독자의 검증하에 게재됨으로써 공정한 여론 형성을 위한 품위있는 정론지를 만들어갈 수 잇는 가능성을 만들어 가고, 독자와 조인스 닷컴이 서로 공동의 이익을 낼 수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평론 기사-가장 신속하게 다각적으로 측면에서 깊이 있게 가공하는 정보가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정보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넷째, 이러한 정보들과 전문적인 논문이나 서적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해야 합니다.

 

흔히들 우리나라를 IT강국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속 사정은 살펴보면 껍데기 뿐인 IT 강국일 뿐, 정말 가치 있는 국가의 발전의 동력이 되는 고급화된 지식시장이 전무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지난 몇 달 사인언스 논문조작의 진상 규명을 위하여 세계를 누비며(?) 웹서핑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피츠버그대학에서 새튼을 검색하니 그의 약력이 나오고 그 밑에 그의 논문이란 하이퍼 링크가 있더군요. 클릭했더니, 미 국립보건원(NHI)의 라이브러리가 뜨면서, 그의 논문 리스트가 다 나옵니다. 하나의 논문을 클릭했습니다. 그 논문의 상단에 공동저자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하나의 이름마다 마다 하이퍼 링크가 걸려있고, 그 중 한 사람 이름을 클릭하면 그가 쓴 논문이 다 나옵니다. 그리고 그 논문의 요약된 내용만 나옵니다. 그야말로 감동적이더라구요. 물론 전문을 다보려면 전문저널에 가서 유료로 자료를 보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가 위에 열거한 정보 분류 형태대로 통합되고, 콘텐츠 재가공을 통한 정보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 생각합니다.

 

 

 

5. 맺는말- 에듀테인먼트(Eutainment)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 ): 교육(education)과 오락(entertainment)의 합성어.

 

인터넷 매체는 그 특성 상 소비자의 상황이 수시로 변동하는 매체입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회적 이슈의 등장으로, 특정 정보에 대한 요구가 폭증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구매동기가 즉각적으로 발생하기도 합니다.

 

인터넷 매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용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성향은 몇가지로 특징지워 집니다.

소비지향, 여가지향, 승진지향(우리나라 교육 열도 여기에 포함), 사생활 지향적이 되어갑니다. 정치문제에 대하여는 책임은 회피하고, 정치적 이슈에 대하여 구두로 항의하는 것에 만족해 하며,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에 악플러가 문제되는 것이 이러한 정치문화와 무관치 않습니다.

 

조인스 닷컴은 공익성과 시장성을 고려한다면, 조인스 닷컴은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에듀테인먼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치있는 정보는 매력적이고 흥미롭게 가공한다는 것이 조인스 닷컴이 추구하는 목표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인스 닷컴이 대중문화에 부응하여 기업으로 성공하길 바라며, 고급문화의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사회발전 나아가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21세기 지식 정보화 시대를 이끌어가는 건전하고 국민으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는 정론지로써의 위상을 공고히 하길 기원합니다.

 

 

正論을 모색한다.

2005-01-03 16:36:49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1214CBS 창사 5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대통령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좋지만 대통령이 밉다고 국민의 희망과 용기까지 깨거나 훼손하는 일은 없도록 했으면 좋겠다 말하며, (대통령이) 밉더라도 한국은 다 같이 잘되게 해보자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언론은 강한 힘을 갖고 있다""날이 잘 드는 양날의 칼과 같아 잘 쓰이면 역사를 진전케 하는 힘이지만 잘못 쓰이거나 권력과 결탁했을 때는 그 폐해가 엄청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자기 이익과 경영자의 이익을 위해 그 막강한 힘이 남용됐을 때는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불가사리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바른 언론이 되자면 항상 바른 소리를 해야 한다""정치는 올바른 목표는 있지만 전략을 위해 둘러가기도 하고 때로는 술수도 용납되는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가끔 내게 언론이 쓴소리를 하고 보통 말로 ''왜 조질까''라고 생각도 해보지만 짜지 않은 소금이 무슨 소금이겠느냐"면서 "언론이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정론(正論)을 펴는 한 그 비판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비교적 건전해 보이는 이러한 노대통령의 언론관에 대하여,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한다.

 

正論이란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이제껏 우리 사회에 참된 의미의 정론이 있었을까? 하는 반성적 성찰과 함께 정론의 의의를 모색해 본다.

 

지금 우리사회의 언론은 그야말로 대 변혁기를 겪고 있다는 생각이다. 종이 신문에서 인터넷 신문의 전환으로 언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발전을 위하여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 어느 때 보다 신장되었다. 하지만 언론의 정론으로써의 자리매김은 더욱 어렵게 여겨지는 상황이기도 하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개인과 집단의 당파적 이익에 기초한 권리의 주장은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사회적 책임은 실종되고, 대립과 갈등이 증폭되어 왔다는 생각이다. 언론 또한 언론이 해야할 사회적 책임보다는 때로는 언론사주의 이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우리 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공익보다는 언론기관을 위한 언론이 아니었나에 대한 자기반성이 필요한 싯점이라 여겨진다.

 

正論이라면 편집권의 독립이 보장되어야 한다. 신문업이란 공익성을 추구하여야 하며, 기업 경영을 성공하여야 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정론이라면 편집권이 경영권과 동등한 관계에 있거나 편집에 관한 한 우위에 있어야 정론이 될 수 있다. 正論不偏不黨하고 是非曲直을 논함에 있어 시시비비의 보도자세가 명확하여야 한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하고, 경제적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 정론은 미래지향적이면서 사회의 보편적이고도 합리적 가치를 추구한다. 政論紙라면 신문의 경영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론지는 사회적 책임의식과 공익 수호에 대한 사명감이 강한 신문이어야 한다. 신문 제작의 측면에서는 고급지를, 경영의 측면에서는 일반지를 지향하는 것이 정론지가 가야할 길일 것이다. 이것이 정론지가 갖추어야 할 이상적이 모델이다. 하지만 정론지를 만든다는 것이 말은 쉽지만 신문 경영 현실 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그것이 언론사주의 건전한 경영철학의 부재와 언론 종사자들의 자질 나아가 우리의 사회문화 수준이 정론지를 만들어갈 여건이 성숙하지 못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87 민주화 이전에는 신문이 검열을 받아야 하는 시절이었다. 그리고 정부가 국가에서 고급 정보를 독점하고 있었다. 정부의 행정방식은 공개되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김대중정부 이후 인터넷 보급의 확대 등으로 언론사나 대기업의 정보 능력이 국가를 앞지르는 부분이 생기기 시작하고, 정부가 사회통합을 위해 언론의 비판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언론개혁 시민단체등 에서 안티조선 운동 등 언론개혁운동이 확대된 배경과 맞물려, 조중동 등 기존의 보수 언론이 DJ 정부에 비판적 시각이 드러나면서 정부와 보수언론사 간의 관계가 뒤틀려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되돌아보면 DJ 정부시절 조, , 동 국민일보 등의 언론사주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 이들 모두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구속되었었지만 알고 보면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태정씨 부인의 옷 로비 사건이 발단이 되어 언론사주들이 줄줄이 구속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기억이다. 그리고 당시 옷로비사건을 장장 몇 달에 걸쳐 DJ정권을 흠집내기에 열을 올렸던 언론의 보도자세는 분명 앞서 언급한 正論의 자세에서 벗어난 것이라 비난받을 이유가 충분하다. 언론이 정부를 비판함에 있어 얄팍한 상업주의를 등에 없고 센세이션날이즘(Sensationalism)으로 마녀 사냥을 했다 비난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저질 센셔이션날리즘에 입각한 폭로 위주의 상업주의적 보도자세는 正論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유감스럽게도 대한민국에 아직은 제대로 된 정론지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나는 우리 나라에 정론이 가능하다는 것에 도전하며, 우리 언론에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려는 자세로 내 나름으로 무던히 애쓰면서 지난 8개월 동안 글 쓰기를 해왔다. 인터넷신문이라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進化된 매체환경이 우리에게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생각이다. 인터넷 환경에서 글쓰기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적응하여 처음 글쓰기를 할 때보다 여러 관점에서 훨씬 유리한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혼란스러운 정치사회 현상에 대한 비평적 이해를 요구하는 독자의 수요가 증가한 사회상황이 이러한 나의 도전을 가능케 하였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나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경제적 이익으로부터 자유롭다. 내 자신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그 대가가 주어지든 말든, 사회발전에 기여하려는 노력이 나의 신념을 실천하는 길이라 믿고 글을 쓰는 것이기에, 정치권력이나 경제적 이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나는 作家의 삶을 살아왔다.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예술적 작업에 대하여, 작가마다 제각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어떠한 사람에게는 글을 쓰다는 것은 현실에서의 도피일 수도 있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켜, 자신의 생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기대한다.

 

내게 있어 글쓰기는 하나의 도전이다.

기존의 사유방식을 뛰어넘어, 새로운 사유의 영역이나 새로 방식의 체험을 전달함으로써, 사물과 삶의 현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인간의 知覺과 감수성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도전이다. 나는 우리들 세상이 보다 밝고 건강한 사회로의 발전을 염원하며 글을 쓴다. 국법질서가 확립되지 못하고 정치가 왜곡된 현실에서, 사회문화적 발전이나 정치적 발전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글이나 思想은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내 개인적 생각이다.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철학이라면 자족적이며 사변적 푸념이거나 지식의 장사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현실을 자신의 철학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철학이란 현실 이하로 추락한다.

 

성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쾌락을 위하여 자신을 망치는 일이요, 영예를 추구하는 일은 자기자신을 완전히 상실하는 일이라는 작가 윤리를 프랑스의 작가 플로베르에게서 배웠다. 지위가 없음을 근심하지 말고, 설 곳을 근심하며,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아줄만한 사람이 되기를 힘쓰며,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함을 염려하지 말고 내가 세상을 알지 못함을 염려하라고 배웠다.

 

스스로에게 정직해야만 세상을 온전하고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적 정직성은 자신의 주장의 개연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장의 한계와 범주를 이해하고 나아가 자신의 주장을 포기할 조건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겸손해야만 배울 수 있고, 용기 있는 자만이 스스로의 허물을 인정하고 고치며, 이를 바탕으로 학습하며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지혜로운 자는 迷惑함이 없고, 용기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고, 어진 사람이라야 근심이 없다고 배웠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이라며 無知를 강조했었다. 공자님은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말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 말했었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철학은 말할 수 있는 것을 명료하게 묘사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했었다.

 

때로는 부족함을 인정하는 용기, 자신의 한계를 아는 지혜와 마음의 평온함이 지혜의 근원이라 생각한다. 추측의 대담함과 사고의 정밀함으로 인간은 새로운 사유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정론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의 글로써 입증하고 싶다. 그리하여 우리 언론 문화수준을 한 단계 향상시키려는 데에 도전하려 한다. 정론을 위하여 나의 글을 쓰는 입장은 명명백백하다.

 

이성은 편견과 독단과 투쟁한다. 살아있는 한 정의는 무지와 투쟁한다. 나는 불신과 반목 대립과 갈등으로 혼란 속에서 국가와 사회의 발전의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우리 사회에서, 법과 원칙이 확립되는 정치문화의 향상을 위하여 글을 쓴다. 자신들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잘못이라 배격하는 독단과 편견에 기초한 편가르기의 부당성을 역설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발전의 방향에서 일탈하여 당파적 이익에 입각하여 개혁을 실시하는 현 정권을 비판하고 나아가 개혁과 국가발전의 방향이 새로운 국법질서를 확립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가능하면 대안을 제시하며 비판할 것이다. 한편 자신들의 기득권과 특권에 집착하여 공정한 사회질서로의 발전을 거부하는 수구반동 세력이 새로운 정치발전을 위해 노력하도록 비판할 것이다. 그 사회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학습능력을 고려하지 않는 문제의 제기는 사회발전을 위하여 바람직하지 못하다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정론이라면 마땅히 문제를 제기한 사안에 대하여, 대안과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전제되어야만, 사회 발전에 동기를 부여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론으로써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발전의 기본동력이 보편적 진리와 합리적 이성에 기초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생각하는 국민만이, 깨어있고 공부하는 국민에게만 보다 밝은 미래가 있다는 것을 역설할 것이다.

 

나아가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사건과 현안들에 대하여 보다 다각적인 관점에서 해설하고 비평함으로써 우리들의 삶에 보다 가치 있고 유익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하려 한다.

 

나는 독자의 요구나 독자의 눈치를 보고 글을 쓰지 않는다. 내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면 독자가 늘어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독자가 줄어들 것이다. 나의 견해가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 하여 자신의 사고방식을 내게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독자를 가끔 만난다. 하지만 남들이 내게 아무리 요구한다 하더라도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니 하지 못한다. 나는 내가 알고 이해하는 것만을, 내가 최선이라 생각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가능한 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독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이 아닌, 내 스스로의 삶과 생각이 보편적 세계관을 배우려 노력할 때 가능하다 믿는다. 인기에 영합하고 독자의 눈치를 보는 작가라면 베스트 셀러의 작가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저질 상업주의 작가 밖에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 지금껏 지켜온 나의 신념이다. 나는 독자의 의견에 개의치 않고, 내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며, 끊임없는 반성을 통해 내 스스로의 삶을 보편적 진리와 세계관에 기초하려는 성찰과 실천을 통하여, 보다 향상된 언론문화, 정치문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내 주장은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정답이 결코 아니다. 사회현상에 정답이 있을 수 있는가? 정답을 말할 능력이란 처음부터 내게 있을 수 없다. 나의 주장이란 내 개인적인 견해이며, 특정한 사회현안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일 뿐이다. 사람들은 나의 주장을 결론으로만 평가하려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결론보다도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사유의 과정에 주안점을 두고 글을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우리 문화의 저열성에 대하여 서구문화의 껍데기만을 배워왔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여긴다. 우리가 진정 선진문화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그 업적이 아니라 그 업적에 이르기까지의 사유과정과 삶의 태도와 노력을 배워야 한다 믿는다. 지식정보화 사회에서의 국가의 발전은 무엇보다 문화의 발전에 의존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억압이 없는 한 진실은 스스로를 알린다. 진실에 기초하여 글을 쓰는 것만이 독자들을 위하여 나아가 국가와 사회발전을 위하여 가장 유익한 일이라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러하기에 나의 생각이 가능하면 진실에 근접할 수 있도록, 그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반성적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을 다짐해 본다. 나는 우리사회에 正論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의 삶과 나의 삶에 기초한 글로써 입증하고 싶다.

 

결국엔 정직만이 최선의 정책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내 살아가는 모습이 다 출판된다 하더라도 부끄럼 없이 살아야겠다 다짐해본다.

좌파와 우파의 공존을 위하여

2005-03-10 17:40:24

 

과거사 청산 문제를 놓고 최근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점차로 증폭되는 듯한 분위기가 우려스럽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갈등이 좌우파 간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확산되는 현실이 우리 모두를 불신과 반목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란 생각이다. 여야간 혹은 좌우간의 화해와 협력의 접점은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좌파적 우파적 사회 인식의 출발점을 보다 깊이 있게 성찰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화해와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정치사상의 기본적인 과제는 인간사회를 어떻게 결합시킬까 하는 문제로 요약된다. 정치사상은 사회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전망을 모색하며 발전되어 왔다.

 

서구의 정치사상사는 두 가지 대립하는 사회관이 때론 대립하고 화해하며 발전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루쏘와 홉스,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상호 대립되는 방법론적 접근으로 사회문제를 이해하려 하였다. 그리고 사상사의 발전에 따라 학파 간의 대립적인 요인은 보다 첨예하고 강렬해졌었다. 2천년 이상 진행되어온 이러한 논쟁은 사회질서에 관한 논쟁으로 인간의 지식, 도덕관, 정치적 태도의 확립에 관한 논쟁이었다.

 

뛰어난 마르크스 비판자이고, 사회학자이며, 정치가였던 독일의 다렌돌프(Ralf Dahrendorf)는 서구 사회사상사를 이끌어 온 커다란 두 가지 줄기를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이해한다.

 

첫째, 인간사회의 성원들은 모두 상이한 의견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성원들간의 價値合意(value consensus)를 형성하기 때문에 사회질서가 유지된다는 견해라 설명하고 이를 이상주의적 사회통합이론(integration theory of society)이라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질서를 가치합의에 기초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합의의 측면에서 인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형성되는 시장질서는 가치합의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합의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뿐이다.

 

탁월한 사회학자인 파슨스(Talcott Parsons) 같은 구조기능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통합이론은 다음의 몇 가지 전제조건을 가정하고 정립된 이론이다.

모든 사회는 지속적으로 안정된 구조이다.

모든 사회는 잘 통합된 구조이다.

사회의 모든 요소들은 사회체제 유지에 대하여 기능적이다.

모든 사회구조는 사회성원들의 가치합의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사회질서의 기본요소를, 안정성, 통합, 기능적 협동, 가치합의에 둔다. 이러한 사회통합론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타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상대적>이란 말을 덧붙여 쓴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사회적 행위의 동기를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규범화하고 구조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우파적 입장은 사회과정을 점진적으로 통합하고 발전하는 획일적 과정으로 단순화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행위 중에 갈등을 유발하고,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소를 사회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배제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우파적 견해의 문제점은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나 문제적 현실에 대하,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질서를 이끌어 내는 노력의 사회갈등의 측면은 배제하고 안정의 측면에서만 찾으려 하면서 사회과정(social process)을 획일적이고 단순한 것으로 규정하려 한다.

 

이것이 우파적 입장의 사회인식이다.

 

둘째, 사회에서의 인간의 결합은 사회 사회성원들 간의 지배와 복종에 의하여, 힘과 강압에 의하여 인간사회가 결합되며 질서가 유지된다고 보는 견해라 설명하고, 이를 합리주의적 사회강압이론(coercion theory of society)이란 말한다.

 

사회강압이론은 사회질서란 강압에 의한 것이 본질적이라 가정하고, 갈등과 대립을 통한 사회변동과 지배와 복종이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보편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우파적 사회통합이론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구조는 유형화되고, 사회는 순환적인 과정을 거치는 균형을 통하여 <기능적으로 통합된 체제>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사회강압이론은 사회질서는 강압과 힘에 의하여 형성된 조직체로 이해하고, 강압과 강압에 반발하는 갈등이 발생하는 힘은 사회구조 자체 내에서 피할 수 없이 발생하는 것이기에, 강압의 힘의 작용과 반작용에 의하여 사회구조는 끊임없는 변동과정을 겪는 것으로 파악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합리주의적 사회관을 제시하고, 사회변동과 갈등, 그리고 지배와 복종이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라 가정하였다.

 

사회강압이론 기본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사회는 변동과정에 있고, 변동은 편재(偏在)적이다.

모든 사회는 언제나 갈등을 내포하고 있고, 갈등은 편재적이다.

모든 사회요소는 비통합 부분이 있고, 이러한 비통합 인자는 사회변동을 우발한다.

모든 사회질서는 일부 성원들의 타 성원들에 의한 강압에 기초한다.

 

이것이 좌파적 입장의 사회인식이다.

 

좌파의 입장에서 특히 공산주의 관점에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법률과 모든 도덕률 등은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억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라는 허위의식이고 사회의 지배층, 부르죠아의 지위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허구적 사회사상이라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사상의 불완전성을 폭로하고 정치적, 도덕적, 법적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확보에 필요한 도구일 뿐임을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의 원천이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불합리성에서 기인한다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의식은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에 입각한 것이다. 의식이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명제가 사실이라면 허위의식의 근원은 사회구조에 있고, 따라서 사회구조가 합리적으로 개선되면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르기는 극복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강압에 의하여 왜곡된 질서가 공산주의 혁명에 의한 통하여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는 역사적 필연성에 의하여 인간해방의 사회질서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우파의 견해가 옳고 좌파의 견해가 틀린 것인가? 아니면 좌파의 견해가 옳고 우파의 견해가 틀린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좌파적 견해와 우파적 견해가 상대방을 존중하고 건전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 상호보완적 역할을 수행할 때, 우리는 보다 성숙한 정치문화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건전한 사회질서는 안정을 기초로 한 새로운 사회발전의 가능성의 모색만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고, 문제점을 이해하여 그 문제의 요인을 제거하는 것만으로 성취될 수 없다. 건전한 사회는 기존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안정된 현실을 기초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건전한 사회의 건설을 위한 사회개혁은 당연히 안정과 변동, 가치합의와 강압, 기존 체제에 대한 순기능과 역기능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면서 진행되는 것이 마땅하다.

 

독재정권 하에서 총화단결에 의한 절대적 사회안정을 강요 받은 상황에서, 사회갈등은 반사회적이라고 것이라고 여기는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우파적 인사들이 갖는 사고의 경직성이다. 획일화되어 안정된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내가 선택한 삶만이 옳다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나와 다른 이들의 삶과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건전한 자유주의적 삶의 방식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異見이 공존하고, 대립과 갈등이 있는 것이 당연히 정상적이다. 진정 슬기로운 사람이라면 이러한 이견 속에서 때로는 갈등하고 대립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보다 나은 삶을 개척하는 계기로 삼는다.

 

독재 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해 온 현 집권 세력은, 기득권층을 자신들의 기득권 옹호만을 위하여 무조건 바꾸지 말자는 반동세력으로 몰아부친다. 이는 현 집권 세력이 국민들이 기꺼이 동참하는 국가 비젼을 제시하지 못하고,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아젠다에 기초하여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현 정권의 무능을 증거하는 표식이기도 한다. 온 국민이 노사모 되어야 개혁이 성공한다는 식의 발상이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 현 정권을 비난하기에 골몰하고 노대통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식의 발상이란 국민화해를 저해하는 반사회적이고 독선적인 편견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개선하여야 할 가장 시급한 병폐는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절대화하고 상대방을 배척하는 독단적 사고와 자신의 입장을 상대방에 강요하는 파시스트적 사고의 행동 방식이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며 반목하고 대립하는 이분법적 흑백논리가 최근 심각한 양상으로 번져가고 있는 우려스러운 우리 사회의 분위기이다. 건전한 반대파가 있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이다. 내 편이 아닌 상대편도 존중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노력을 통하여 우리는 참된 의미의 국민화합을 달성할 수 있다.

 

비관적 세계관은 폭력을 정당화하기 쉽다. 반면 낙관주의적 삶의 태도는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현실의 문제점들을 호도하고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현 사회를 보는 관점이 우파의 입장은 낙관적으로 보려 한다. 반대로 좌파는 기존의 우리 사회를 비관적이고 부정적 관점에서 왜곡되고 비뚜러진 역사의 산물로 여기며 기득권층 다 때려부수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과거사 청산 등의 현 정권의 개혁이 기존 질서에 파괴적이다. 그리고 좌파정권이라 여기는 현 정권 하의 야당이나 기득권 세력들은 지금의 현실정치에 비관하며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지 못하고, 현 정권에 대한 매도만을 일삼는 것이 전부인 채로 지리멸렬 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집권 3년 차를 맞는 노무현 정권은 이제, 건설하지 못하고 부수고 빼앗는 것이 전부인 개혁이라면 그것은 스스로의 무덤을 파는 것이며, 자신들의 집권기반을 무너뜨리는 자해행위라는 것을 어서 빨리 깨닫기 바란다. 마찬가지로 현 정권을 비난하기 위한 비난 이외에 새로운 미래의 비젼을 발굴하지 못하는 야당에게 말하고 싶다.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고 자신들의 현재의 위상을 바르게 정립해야만이 국민들이 공감하는 미래의 비젼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지금 여야는 서로 불신과 반목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들만의 입장을 고집한다.

이것은 단지 정치권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잘못된 정치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고 국민들간의 불신과 반목이 증폭되고 있다. 폭력은 자신의 의사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데에 실패하였을 대에 발생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대화는 실종되고 불신과 반목 대립과 갈등으로 점차로 폭력적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우려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분열의 책임에 대하여 정치권은 여야할 것 없이 그 책임을 통감하여야 할 것이다.

 

정치에 있어 좌파적 견해와 우파적 견해는 상호보완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파적 견해는 우리사회의 안정과 가능성을 모색한다. 좌파적 개혁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제거하고 국가권력의 정당성의 확립에 앞장서야 한다고 믿는다. 허물을 고치기를 꺼려 말라 하였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데 게으른 사람에게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해결능력을 초과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치기 어린 개혁이 우리 사회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외면하여서는 결코 아니될 것이다. 나아가 미래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 없는 개혁이 국민적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없고, 국민적 합의와 참여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개혁이란 국력의 낭비만을 초래하는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다

 

좌파와 우파가 왜 싸우면 안되는가?

한 예를 들어보자 오른손잡이 권투 선수가 있다. 왼손은 상대방을 가격하기 위해 거리를 맞추고 어느 정도의 세기로 어느 부분을 칠 것인가를 탐색하는 리딩(reading) 펀치이다.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자신이 잘났다고 싸운다. 왼손은 왼손이 목표물을 가늠하지 않으면 오른 손이 제대로 상대방을 가격할 수 없으니 자신의 공을 자랑한다. 오른 손은 무슨 소리냐고 왼손은 제대로 때리지도 못하는 주제라며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것은 오직 오른 손이라 자랑한다. 하지만 왼손이 없다면 오른 손을 제구실을 못한다. 마찬가지로 오른 손이 없는 왼손이란 쓸모 없는 것이 된다. 왼 손과 오른 손이 한 마음으로 싸워야 권투시합에서 승리할 수 있다. 나는 사회발전에 있어 좌파와 우파의 관계가 권투선수의 왼손과 오른 손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넓은 의미로 좌파란 원칙적이고 우파는 현실적이다. 원칙 없는 현실은 지속되지 못하고, 현실을 도외시 한 원칙이란 탁상공론이 될 뿐이다. 지속적으로 성공적인 삶이란 원칙과 현실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스스로의 삶이 다른 이들로부터 존중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남을 존중하는 것부터 배우는 것이 순서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인간은 누구나 존중 받을 권리가 있듯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보다 성숙한 문화- 화해와 협력을 통하여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밝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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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2005-02-28 18:49:15

 

지금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절실한 과제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경제살리기를 말한다. 하지만 경제문제도 보다 근원적 이유를 캐내보면 계층과 집단, 지역과 세대 간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취약한 정권 기반에서 시작한 노무현 정권은 지난해 대통령 탄핵과 4.15총선을 거쳐 집권기반을 강화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노대통령의 이러한 집권기반 강화 전략 나아가 현 정권의 개혁이 국론분열을 야기하였고,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킨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지도력 강화를 위하여 정권기반을 강화하기 노대통령의 개혁을 위한 전략이 지금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노대통령의 지도력을 위협하고 있다. 결국 개혁 대 반 개혁으로 지지기반을 강화하려는 현 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국론 분열과 사회갈등을 고조시킨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출범 3년차를 시작하는 노무현 정권에게 그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국민 통합의 리더쉽일 것이다.

 

현 정권을 좌파정권이며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식의 계급갈등을 촉발하는 야당의 현 정권에 대한 대안부재의 정치공세는 단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 수호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현 정권의 개혁 또한 현 정권의 개혁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이 없는 기득권 빼앗기 식의 자신들의 집권기반을 강화시키기 위한 또 다른 의미의 이데올로기에서 추진되는 것이며, 국민화합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사회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계급 당파적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구도는 분명히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갈등 요인에 대하여 與野할 것 없이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만이 생각이 객관적이라 절대화하는 것은 정신적 미숙의 증거이다. 여야할 것 없이 대립하는 정치집단의 주장과 정책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권력획득이나 권력강화에 연관되어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주장의 범주와 한계 나아가 포기할 조건을 이해함으로써 나아가 상호존중에 기초한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만이 우리 사회의 정치발전과 사회적 연대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ideology)라는 말이 18C 프랑스에서 처음 쓰여졌을 때, 그것은 인간이 가진 관념이나 사상을 연구하는 학문(the study of ideas)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이데올로기는 사회에 대한 사상 또는 지식(ideas about society)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고, 오늘날 사용되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때로는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당파적 이해에 기초한 현실에 대한 삐뚜러지고 왜곡된 사상이나 지식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정당이나 그 밖의 정치적 조직체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이론으로 생각되어 왔다. 정당과 같은 정치 조직체들은 일정한 계급이나 계층 그리고 특정 세력에 지지를 호소한다. 이데올로기는 무엇보다 설득과 행동의 유도를 목적으로 하는 규범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정당의 정책이나 이념이 매력적인 것이라면 그 정당이 주장하는 정책은 지지세력의 利害와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정당의 主義, 主張이나 정책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특정 정당이나 정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지나치게 왜곡하거나 단순화시키거나 왜곡시켜 부각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는 데에 있다. 지난해 연세대에서 행한 <보수는 무조건 바꾸지 말자>고 말하는 식의 노대통령의 발언이나, 현 정권을 단순히 반미 친북의 빨갱이로 매도하려는 극우적이며 사회발전에 반동적 집단의 주장은 이데올로기의 대결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좌우익으로 갈라져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신념 및 사상체계를 갖추게 되고, 반대파의 이데올로기를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찬 왜곡된 사상으로 규정하고 배척한다. 대립하는 정치집단은 자신들만의 생각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상대방의 주장은 기만적인 허위의식이라 비난한다.

 

다니엘 벨(Daniel Bell)西歐에서의 이데올로기 종언’ (The end of ideology)을 주장했을 때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극단적 정치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이다. 다니엘 벨은 에드워즈 쉴즈(Edward Shils), 로버트 하버(Robert A. Harber) 등과 함께 혁명을 통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허구가 서구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강조한 이데올로기 終焉論者이다. 이데올로기 종언론자들은 이데올로기 종언론의 근거로, 첫째, 서방세계에서 지난 수 십년 동안 민중봉기, 혁명 통한 인민의 천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허구임이 드러났으며, 둘째,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민중의 위한 정치제도로 부적합함에 대한 평가가 내려졌고, 셋째, 이데올로기에 힘을 제공하였던 계급 간의 갈등이나 빈부 격차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해소되었으며, 넷째,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현대사회가 단순한 합리주의나 과학적 신념에 의한 사회공학을 통해, 하루 아침에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이나 과학자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말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이론에 최초로 체계 있는 이론적 성격을 부여한 마르크스(Karl Marx)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보고, 모든 이데올로기적 신념이나 이론을 배척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현상을 유지를 꾀하는 선택적이고 왜곡된 사상이라 규정하였다.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지배층, 부르죠아의 지위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허구적 사회사상이라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사상의 불완전성을 폭로하고 정치적, 도덕적, 법적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확보에 필요한 도구일 뿐임을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의 원천이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불합리성에서 기인한다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의식은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에 입각한 것이다. 의식이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명제가 사실이라면 허위의식의 근원은 사회구조에 있고, 따라서 사회구조가 합리적으로 개선되면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르기는 극복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인간의 모든 지식과 이념은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지만 끝내는 역사적 필연성에 의하여 인간지식이 이데올로기성(허구성)을 극복하고 참된 의식과 지식을 찾게 될 것이라 믿었다.

 

칼 만하임(Karl Manheim)은 그의 저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Ideologie und Utopie>에서, 이데올로기를 명확히 구별되는 두 가지 의미, <이데올로기의 特殊性><이데올로기의 全體性>의 의미로 파악한다.

 

이데올로기의 특수성이란 우리가 우리들의 상대방이 표명하는 이념과 관념들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정치적 반대자들의 주장이란 현상과 본질을 의식적으로 은폐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러하기에 사회현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란 상대방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왜곡행위는, 의식적인 거짓말에서부터, 부지불식 간에 저지르는 은폐, 치밀하게 상대방을 속이는 것으로부터 자기기만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다. 거짓말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개별적 분화되고 발전되어 온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특수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전체성이란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 구체적 역사적 사회적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데, 이데올로기의 전체성이란 시대 또는 계급집단이 지니는 전체적 의식구조의 특성과 성향이다. 예를 박정희가 생각한 국가발전이란 국가의 총생산의 증가가 국가의 발전이라는 여기는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이다. 개발독재 시대의 성공하는 인간의 의식이란 출세하기 위하여서는 줄 잘 서고 힘있는 자에게 빌붙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 자신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 믿고 살아온 것이다.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의 특수성과 전체성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한다.

 

두 개념이 지니는 공통점은, 상대방이 주장하는 의미와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어떠한 정치집단의 주장이나 개인의 주장을 이해함에 있어, 그 주체의 사회적 존재를 이해함으로써, 그의 주장이 아닌 말하는 주체의 삶의 조건에 의하여 그의 주장을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 주체가 주장하고 표명하는 이념은 그의 존재의 기능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떤 사람의 의견, 진술, 제의, 사상체계는 그가 말하는 외형상으로 드러난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상황의 견지에서 해석된다. 예컨데, 당연한 귀결로 열린우리당 당원은 열린우리당의 이데올로기를, 한나라당 당원은 한나라당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사고하고 주장한다. 나아가 주체의 특정한 성격 및 의식구조도 존재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의 의견이나 현실인식이 영향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보유하는 사람의 삶의 기능이 되기도 하고, 사회에서 그가 점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나 지위의 기능이 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의 특수성과 전체성에는 현격한 차이점도 있다.

이데올르기의 특수성은 상대방이 이데올로기라고 주장 것의 일부만을 지칭하고, 그 주장의 내용을 문제삼는 반면에, 이데올로기 전체성은 상대방의 전체적인 세계관을 문제 삼으며 상대방의 주장이란 상대방 참여하거나 지지하는 집단의 집단적 의식이 소산으로 이해하려 한다. 예를 들면 이라크 파병을 반전운동이나 친미행위로 보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특수성의 문제이고, 노빠는 말 뿐인 기만적 개혁으로 현실 파괴적이라 비난하고, 딴빠는 사회발전과 개혁에 반대하여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에 연연하는 수구 꼴통이라는 식의 상대방의 세계관과 삶의 태도에 대한 비난은 이데올로기의 전체성의 문제이다.

 

인간의 모든 사상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자신이 처한 사회환경에 구속받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된 왜곡된 사상일 수 밖에 없다는 만하임의 초기 견해는 이 후, 인간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와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신의 지식이 왜곡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과 개방적인 지적 교류를 통하여 객관적이고 타당성 있는 지식이 정립 가능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만하임의 이러한 변화는 보다 객관성과 타당성을 갖는 지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노력으로 평가된다.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논의 자체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럼에도 우리 현실은,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계급모순과 민족 모순을 극복을 염두에 둔 현 집권 세력의 개혁과 현실인식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 집권 세력이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을 기획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2년 간 보여준 현 집권 세력의 행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거하여 기득권 세력의 기득권을 박탈하거나 제제하는 것이 사회정의를 위하는 것이라는 믿는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야당의 일각에서는 현 정부를 좌파정부이고 빨갱이로 매도하며 사회발전을 위한 개혁마저도 거부하는 수구적이며 사회발전에 반동적인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세력이 여전히 상존하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의 우리 사회가 좌우익으로 갈라져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신념 및 사상체계를 갖추게 되고, 반대파의 이데올로기를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찬 왜곡된 사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현실을 우려한다. 이러한 현실이 있게 된 사회역사적 배경에 오랜 세월 독재 정치문화에 젖어, 나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며,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잘못 살아온 우리들의 삶이 있다. 나는 우리들 스스로 옳다고 믿고 있는 정치적 신념이나 가치들이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데올로기론이 말하는 허위의식에 젖어 있다고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국민화합을 위해, 통합의 리더쉽이 절실히 아쉬운 싯점이다. 하지만 통합의 리더쉽 못지 않게 우리들 스스로 실천해야할 시대적 과제가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의 삶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을 우리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아쉬운 때가 아닐까? 우리들 스스로 노빠와 딴빠로 대립하여 우리들 스스로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반목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옛 성현이 이르기를, 나만이 옳고 남은 그르다 말한다면 그르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 말했었다. 자신의 주장만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신적 미숙을 토로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성숙한 인격은 스스로의 주장이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개방성을 견지하고, 스스로 끊임없이 반성하고 학습한다. 반성하며 학습하는 개인만이 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처럼, 반성하고 학습하는 사회만이 새로운 역사적 도약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사회가 진정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고 상호존중을 통한 국민화해를 이룩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결집된 국민적 역량을 발휘하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그리고 우리의 문화에서 반성적 지성이 갖는 가치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참된 의미의 지성은 지성에 의하여 알 수 있는 것보다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이해한다. 사람은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인간실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이해 또한 깊어진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지식산업시대의 신문

2004-12-09 08:29:54

 

 

1. 정보산업이란 아이디어와 정보를 생산 분배하는 산업이다. 신문업은 정보를 수집하여 평가하고 가공하여 새로운 가치를 지닌 정보를 생산하여 분배하는 산업이다. 과학 기술의 시대를 넘어서 이제는 정보화 사회이고 지식산업 시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디어산업은 최첨단산업이다. 국가나 사회의 발전은 그 사회나 국가가 유용한 정보를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로 결정된다. 사회의 진화는 사회성원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에 의존한다.

 

 

2. 신문시장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공개되는 인터넷 환경으로, 신문업은 소비자의 이익을 극대화할 때, 기업의 이익은 극대화된다는 고전적 시장의 원리가 가장 근접하게 적용되는 사업이 되었다. 여론을 왜곡하던 시대는 이미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신문업의 성패는 정보를 수집하여 분석하고, 어떠한 카테고리에서 종합, 가공, 정리하여, 독자에게 가장 유용하고 효과적으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DB를 구축하는 데에 있다.

 

 

4. 기사의 가치는 경쟁을 통하여 결정된다. 기사의 가치는 그 주제를 다룬 다른 기사와의 경쟁 속에서 결정된다. 세상에 완전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쏟아지는 정보의 양은 개인이 제대로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많고 복잡하다. 하이예크의 말처럼, 경쟁이란 개인이 불완전하게 지니고 있는 지식 내지는 정보를,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의 변화에 대하여 조정해 나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어떤 재화가 희소하고 그 재화의 가치가 얼마냐는 것은 사전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경쟁을 통해서 발견된다. 개인의 지식이 불완전한 경우 경쟁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 사회가 복잡해지고 불완전해질수록 경쟁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개인이 지니고 있는 지식은 단편적이고 불완전하다. 경쟁은 개인이 불완전한 지식을 각자의 목적에 맞게 보완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기에 기사의 가치는 필자의 업적이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말하는 내용에 대한 다른 정보 매체와의 경쟁에서, 얼마만큼의 우위를 차지하고, 희소성을 가지고 있느냐로 결정된다. 나아가 사회적 또는 정치적 의사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의 정도로 평가된다.

 

 

5.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중요한 정보가 무엇이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해설하고 이해를 돕는 평론이 중요하다. 신문기사의 가치는 정보의 분석을 위한 다각적이고 다차원적인 평가를 통하여 보다 깊이 있고 균형잡힌 이해를 돕는 정보를 생산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6. 우리사회의 신문사들은 인터넷 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최근 정부의 신문법 개정 취지는 종이신문을 죽이고 인터넷 신문을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이다. 조중동의 사주나 편집진은 인터넷의 환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종이신문 기사을 온라인에 올려놓는 수준에서 인터넷 신문이 제작되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혁신되어야 한다. 온라인 신문에서 심층기사를 쓰도록 하고 종이신문에 이를 요약 정리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기사의 작성은 보도에서 해설과 평론의 기능을 강화하여야 한다. 독자에게 중요한 정보를 식별할 수 있는 가공된 정보를 생산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건전한 여론 형성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기존 조중동의 사설이나 논설위원 글들 중, 사회문제와 현상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에게 학습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는 글이 몇이나 될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어떤 이슈에 대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수준에서 글을 쓴다. 독자의 수준과 필자의 수준에 차이가 없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다시 말해 가치 있는 기사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Sensationalism에 입각한 선동적 자극적 관점에서 정부를 비판하고 사회비리를 폭로하는 기사작성의 태도는 마땅히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7. 지금 대학생들은 종이신문보다 인터넷 신문을 선호한다. 예를 들면 신문기사를 가지고 정보검색하고 글을 쓰려는 나 자신의 경우 종이신문은 보지 않는다. 국내 5~6개의 일간지를 인터넷으로 제목을 훓어 보고, 그 중 가장 관심이 많은 기사를 평가 분석하여 내 나름으로 소화하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 가치 있는 글을 생산하여 독자에게 가장 유용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려 한다. 보도된 신문기사 내용을 인용할 경우가 많다. 관련기사를 월 별 주제별로 나누어 보관하고 필요에 따라 다각적인 관점에서 과거기사를 재검토하며 글을 쓴다. 일의 제대로 하기위해 어쩔 수 없이 종이신문을 버리게 된것이다. 나의 경우 대중적인 인기보다는 어떠한 사안에 대한 보다 다각적이고 다차원적인 평가를 통하여 기존의 신문기사보다 보다 가치 있고 영향력 있는 글을 쓰고자 공부를 하면서 글을 쓴다.

 

 

8. 미디어 시장은 그야말로 적자생존의 시장이다.

저명인사가 네임 밸류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는 끝났다. 뉴스나 기사에 대해서 끊임없이 공부하며 평가 분석하는 자세 없이는 미디어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9. 인터넷 신문은 일간지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편집에 있어서 획기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톱뉴스가 2시간 만에도 바뀔 수 있지만 가치 있는 기사는 며칠 동안이라도 붙어있어도 괜찮다 생각한다. 때로는 일간지라는 사고의 틀을 깰 수 있는 획기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10. 빌게이츠는 종이신문은 결국 사라질 것이라 말했었다.

종이신문이 사라질 것이라는 빌게이츠 말에 대하여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생각한다. 혹자는 인터넷 신문이 컴퓨터를 켜고 끄는 불편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상황을 모르는 소리이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켜놓고 일하는 노동인구와 하루에 3~4시간 이상 컴퓨터를 켜놓는 것이 일상화 된 주부나 학생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신문사들은 종이신문에 대하여 인터넷 신문이 갖는 성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인터넷 신문은 지면의 제약이 없고, 멀티미디어 환경을 지원한다. 동시에 독자와 필자가 쌍방향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환경이 제공된다. 인터넷 신문은 건전한 여론 형성의 공론장을 제공하는 사이버 공동체의 관리자이어야 하며 나아가 디지털 콘텐츠의 프로듀서라야 할 것이다.

 

 

11. 신문은 권력이다.

프랑스의 작가 까뮈는 <전락>이란 소설에서, 한 퇴직 변호사의 독백을 통하여, 현대인들은 신문과 TV를 열심히 보고, 간통을 꿈꾸며 살아간다고 적고 있다.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의 비극에 굶주려 있다는 점을 말한다. 단조롭고 지루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 현대인들에게 다른 사람의 비극은 위안이 된다. 다른 사람의 비극에 눈물 흘리고 다른 사람의 비리에 비분강개한다. 이를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자신들의 삶의 정당함을 확인하는 계기로 삼는다. 신문은 대형의 비극을 특종하고 사회비리를 폭로하는 것을 특종으로 잡는다. 몰인정하고 인정 사정없는 것이 세상인심이기도 하다. 신문은 이를 장사 속으로 다룬다.

 

이해찬 총리는 베를린에서 조동은 지들이 권력인줄 안다며 조동은 내 손안에 있다며 까불지 말라 말했었다. 이번 개정 신문법안이 조중동을 겨냥한 것도 조중동의 사회적 영향력이 권력행사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언론 개혁운동을 벌여온 신문 단체들은 한결같이 신문이 권력기관이 아닌 보도 기관이어야 한다 주장하며 언론개혁을 주장한다. 언론기관의 횡포나 폐해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스개 소리로 돌아다니는 말에, 기자와 세무공무원과 경찰관이 술집에서 함께 술을 먹었다 한다. 누가 술값을 내느냐 질문한다. 정답은 술집 주인이 낸다는 것이다. 정부에 새로운 기관장들이 취임하면 기자간담회라는 이름으로 기자들 모아놓고 술사고 밥을 산다. 어떠한 기관에 대하여 좋은 기사를 써주고 광고청탁을 하는 것이 신문사의 관행이다. 기자를 사칭하여 협박 공갈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문이 타락한 권력이란 증거이다. 과거 독재정치 하에서 경찰이든 세무공무원이든 기자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직업인은 못되었다. 권력이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위력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조정하고 싶어한다. 권력은 타락한다. 이러한 잘못된 과거에 대하여 신문은 뼈를 깎는 자기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로 신문발행이 허용되지 않았던 미국의 현실에서, 토마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는 정부 없는 신문을 원한다며 민주주의 국가건설에서의 신문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신문은 권력이다. 신문을 권력의 제4부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될 수 있는 국가권력을 견제하는 제어장치의 역할을 담당하고, 나아가 건전한 여론을 형성하여 사회의 건전성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건전한 권력은 세상을 건설적이고 생산적이며 활력 있게 만들며, 인간 상호 존중 바탕 위에 화해와 협력을 통한 평화와 번영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신문은 건전한 문화를 창달하는 위치에서, 문화권력의 건전한 향도자이어야 할 것이다. 문화는 사회를 보호한다. 문화는 사람들에게 보다 지적 정서적 세련화를 통하여, 우리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고 넉넉하게 만든다. 요즈음처럼 잘못된 정치풍토로 인하여 세대 간 계층간 지역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속된 말로 악에 바쳐 편가르기를 하며 싸우는 부끄러운 우리들의 모습은 문화의 부재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문화는 사람이 보다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문화의 향도자로써 미래의 신문은 고급화되어야 한다 믿는다.

우리사회에는 대중문화만 있고, 고급문화는 아예 없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서구문화나 일본 문화를 그대로 좇아 흉내내기 급급한 것이 부끄러운 우리 문화의 수준이다. 나는 언론이 정부에 대안을 제시하며 비판하고, 국민에게 문화생활을 통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너무 보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 공부하지 않는 국민에게 나라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언론이 공부하는 문화를 향도해주길 기대한다. 인터넷에 길들여진 청소년들은 깊이 생각할 줄 모르고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쓴 글이 어렵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나는 독자에게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글을 쓰고자 가능한 한 열심히 공부하며 글을 쓴다. 깊이 있는 내용을 쉽게 쓸 수 있는 것은 글 쓰는 이의 능력이다. 부족한 능력을 채우기 위해 보다 노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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