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9-03 14:35:26
196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는 왜 글을 쓰느냐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만약 그 이유를 알고 있다면 대답하였을 것이다.>라 말했었다. 누보로망의 작가 로브그리예는 당신은 왜 소설을 쓰십니까? 라는 질문에 <내가 왜 소설을 쓰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쓴다고 했었다.> 예술이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가능성이고,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이란 전제 하에, 예술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질문할 때, 이에 대한 20세기 예술의 대답은 회의적이다.
왜 쓰느냐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세상에서 희망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글을 쓴다.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도정이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삶이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며, 한 번 뿐인 삶이기에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견디기 어려운 세월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내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아왔다.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가능하면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비관주의적 세계관은 폭력을 정당화하기 쉽다. 반면 낙관주의적 세계관은 현실의 문제를 호도하기 쉽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릇된 희망을 가지고 살며, 그릇된 희망 때문에 좌절하고 분노한다. 우리들의 삶과 삶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삶을 보다 성공적으로 이끈다.
나는 내가 세상에 무엇을 얼만큼 말할 수 있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글을 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나의 능력이 향상될 수 있음을 배워간다. 세상에 관한 나의 견해가 가장 올바르고 객관적이라 고집할 생각은 없다. 나만이 최고이고 객관적이라 주장하는 것은 정신적 미숙의 증거이다. 성숙한 인격은 자신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 어쩌면 나의 삶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보다 개방적일 수 있다. 지적 정직성은 자신의 주장의 개연성을 입증하는 데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장의 범주와 한계를 이해하고 포기할 조건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나의 주장은 우리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개인적 견해의 표명일 뿐이다. 나는 나의 주장이,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새롭게 사고하는 방식을 드러내어 보여주거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자극이나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나의 생각을 토로하는 것이 아닌, 나의 지식이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능한 내가 의도하는 대로 전달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생각이 올바르다면 그리고 이를 전달 가능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거짓은 번거롭고 장황하지만 단조롭다. 내가 아는 한 진실은 단순하고 명백하다. 진실은 억압이 없다면 스스로를 알린다. 나의 말은 나의 삶이고, 나의 주장은 나의 삶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자본주의 시대이다. 상술의 요체는 허풍에 있다. 하지만 적어도 거짓과 허풍과 자신에 대한 과대포장으로 쓰여진 글이 설득력이 있을 리 없다. 우리가 이해하고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는 삶과 사물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글쓴이의 삶과 사물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의 치열성에 의존한다.
나의 관점에서, 어떠한 사안이나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생각에 편견이나 무지에서 기인한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면, 그것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이해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람들에게 사회현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다 폭넓고 균형 잡힌 것이 되게 하려는 데에 기여하기 위하여 글을 쓴다. 나는 우리사회의 발전과 정치발전을 위하여,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것 보다, 어떠한 사안별로 비판적 관점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발전에 유익하다 믿는다. 나는 내가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사회가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이끌려 가는 사회이길 바라며, <합리적 사고>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원칙이야말로, 역사발전에서 유일하게 이상적이며 실용적인 원칙이라 굳게 믿는다.
나의 주장이 다른 사람의 주장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나의 주장이 더 나은 주장에 의하여 극복되기를 기대한다. 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고집하는 것보다, 우리 모두의 삶이 보다 폭넓은 삶에 대한 이해와 보다 나은 생각에 의하여 개선되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믿으며 살아왔기에 그렇다. 되돌아보면 실패와 오류투성이로 점철된 것이 나의 지난 날들 이었다. 하지만 비록 실패하였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면 내가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했기에 진실은 실수에서 훨씬 분명하게 발견되기도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글을 다시 살펴 보면 아쉬운 점과 부족한 점이 항상 눈에 띈다. 나는 글 쓰기를 통하여 이러한 나의 부족한 점들이 점차로 개선되기를 기대하며, 가능하면 반성적인 태도로 글을 쓰려 애쓴다.
내가 아는 한 成人의 경우,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는다. 자기 주장을 지키고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주장에 의하여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란 여간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작가가 한 권의 책에서 한 줄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확실하게 던질 수 있으면 성공적이라 생각한다. 가능하면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주장으로부터 나의 삶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배우려 노력한다. 진실은 명백하며, 진리는 억압이 없다면 스스로를 알린다는 사실을 믿는다. 내가 살아온 삶의 진실에 비례하여, 보다 가치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나의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과 노력의 크기만큼 우리 현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을 배워왔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 대한 참된 애정과 용기와 헌신의 크기만큼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무질서와 혼돈의 세상이란 생각을 해본다. 잘못 살아온 과거의 누적된 사회구조적 모순과 방향성을 상실한 채 진행되는 개혁이 우리사회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가치관의 혼란과 삶의 불확실성이 문제투성이의 잘못된 정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 무엇보다 급속하게 변화되는 과학기술의 변화는, 유행의 변화를 촉진시키고, 미적 기준 이나 嗜好의 혼란을 야기시키며, 끊임없이 새 것을 추구하게 하고, 삶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하며, 실속 없는 새로운 것으로 변화욕구를 자극한다. 삶은 점점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살아가면서 자신감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점차로 어려운 것처럼 여겨진다. TV가 주요 재산목록으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3년 묵은 컴퓨터를 재산이라 여기는 사람은 없다. 새로운 제품이 점점 빠른 속도로 나오게 되면 이에 따라 물질적 재산에 대한 집착이 약해지고 나아가 정신적 자산이나 신념에 대한 집착도 희미해진다. 어떠한 사상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도 유행의 변화 속도에 적응하게 된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 앞에서 현대인은 일찍이 없었던 생활감정의 격동적 변화에 대응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이로 인하여 노예제도가 존속되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을 기를 수 없게 된다. 우리 앞에 놓여진 거짓과 삶의 오류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보다 나은 삶을 모색하려는 합리적은 통찰은 그 무엇보다 용기를 필요로 한다. 스스로의 삶을 이성적으로 이끌려는 용기 없이 우리의 삶은 합리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무지와 오류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와 서로 다른 계층과 집단 세대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으로 우리 스스로의 행복을 짓밟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에 대하여,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이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지성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라 믿는다.
칸트는 <계몽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계몽주의는 인간 스스로가 부과한 미성년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미성년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悟性을 사용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悟性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지도가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悟性에 입각하여 살아가려는 용기와 결단력의 부족에 있다. 이러한 게으름과 비겁은 그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기꺼이 미성년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며,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삶을 지도자에게 예속시키는 이유이다.>
건전한 이성은 우리들의 삶이 상황이나 원칙에 치우침 없이, 합리적이며 성공적으로 우리들의 삶을 개선하도록 이끈다. 혼돈과 미망의 불확실성의 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우리 스스로 깨어 있는 정신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삶의 현실을 직시하려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를 만들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불확실성이 우리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 앞에 놓여진 우리들의 삶에 대한 개선은 우리의 삶의 상황과 우리의 역량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해야할 바를 찾아내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불확실한 우리의 현실에서, 사람들에게 보다 정돈된 시각으로 이성과 합리성에 기초하여 우리들의 삶과 현실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
헤겔은 그의 <美學>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정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기존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항의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둘째, 기존의 사회조직에 진실되고 견고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셋째, 그 사회조직과 화해하고 실생활에서 적극적 역할을 맡으나 넷째, 혼란스러운 현실의 散文性을 말소하고, 예술의 아름다움에 더욱 접근하는 정형화된 詩性을 도출하는 정신이라 말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획일성만을 강조하며, 줄 세우기와 편 가르기로,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였던 독단적이고 정당하지 못했던 잘못된 사회운영방식을 뛰어넘어, 우리 모두가 화해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사회질서, 국가질서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청된다 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고갈된 자원인 <사회적 연대성>을 회복하는 길은 민주주의적 헌정질서를 확립하고, 참된 의미의 법치주의 국가질서를 확립하며, 이를 위하여, 헌법이념이 일상생활에서 구현되기 위한 법전체계의 정비가 시급하다고 믿는다. 독재정치를 혐오하고 살아왔다. 진정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세상, 우리 모두가 화해와 협력으로 함께 손잡고 우리의 미래를 개척하는 새로운 국가질서 만들기 위해, 내 생을 던져 공부하고 노력해 왔다.
힘있는 자의 횡포와 국가권력의 횡포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왔다. 합리성과 이성이 존중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그러한 세상을 가꾸어가기 위하여,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내 스스로는 떳떳하고 당당한 삶을 살아왔다. 나의 정신은 무지와 편견과 독단에 항거하는 나의 칼이다. 이성은 항상 정의와 평화, 인류의 복지의 편에 서서 결단한다. 정의는 끝끝내 승리하고야 만다는 희망의 증거가 되기 위해 글을 쓴다. 이제는 잊혀져 아무도 믿는 이 없을 것 같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잃어버린 전설을 보다 많은 사람들의 신념으로 되살리기 위해 내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