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9-03 14:35:26

 

196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는 왜 글을 쓰느냐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만약 그 이유를 알고 있다면 대답하였을 것이다.>라 말했었다. 누보로망의 작가 로브그리예는 당신은 왜 소설을 쓰십니까? 라는 질문에 <내가 왜 소설을 쓰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쓴다고 했었다.> 예술이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가는 가능성이고,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이란 전제 하에, 예술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질문할 때, 이에 대한 20세기 예술의 대답은 회의적이다.

 

왜 쓰느냐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희망이 없을 것 같은 세상에서 희망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글을 쓴다.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도정이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삶이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며, 한 번 뿐인 삶이기에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견디기 어려운 세월이 없었던 것도 아니지만, 내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아왔다. 사람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가 가능하면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비관주의적 세계관은 폭력을 정당화하기 쉽다. 반면 낙관주의적 세계관은 현실의 문제를 호도하기 쉽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릇된 희망을 가지고 살며, 그릇된 희망 때문에 좌절하고 분노한다. 우리들의 삶과 삶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삶을 보다 성공적으로 이끈다.

 

나는 내가 세상에 무엇을 얼만큼 말할 수 있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글을 쓴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나의 능력이 향상될 수 있음을 배워간다. 세상에 관한 나의 견해가 가장 올바르고 객관적이라 고집할 생각은 없다. 나만이 최고이고 객관적이라 주장하는 것은 정신적 미숙의 증거이다. 성숙한 인격은 자신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 어쩌면 나의 삶보다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다른 사람에게 보다 개방적일 수 있다. 지적 정직성은 자신의 주장의 개연성을 입증하는 데에 있지 아니하고, 자신의 주장의 범주와 한계를 이해하고 포기할 조건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나의 주장은 우리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개인적 견해의 표명일 뿐이다. 나는 나의 주장이,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새롭게 사고하는 방식을 드러내어 보여주거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자극이나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나의 생각을 토로하는 것이 아닌, 나의 지식이나 체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능한 내가 의도하는 대로 전달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생각이 올바르다면 그리고 이를 전달 가능한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거짓은 번거롭고 장황하지만 단조롭다. 내가 아는 한 진실은 단순하고 명백하다. 진실은 억압이 없다면 스스로를 알린다. 나의 말은 나의 삶이고, 나의 주장은 나의 삶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자본주의 시대이다. 상술의 요체는 허풍에 있다. 하지만 적어도 거짓과 허풍과 자신에 대한 과대포장으로 쓰여진 글이 설득력이 있을 리 없다. 우리가 이해하고 표현하여 전달할 수 있는 삶과 사물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글쓴이의 삶과 사물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의 치열성에 의존한다.

 

나의 관점에서, 어떠한 사안이나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는 생각에 편견이나 무지에서 기인한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면, 그것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이해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람들에게 사회현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다 폭넓고 균형 잡힌 것이 되게 하려는 데에 기여하기 위하여 글을 쓴다. 나는 우리사회의 발전과 정치발전을 위하여,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것 보다, 어떠한 사안별로 비판적 관점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우리사회의 발전에 유익하다 믿는다. 나는 내가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것과 똑같이, 우리사회가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이끌려 가는 사회이길 바라며, <합리적 사고>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원칙이야말로, 역사발전에서 유일하게 이상적이며 실용적인 원칙이라 굳게 믿는다.

 

나의 주장이 다른 사람의 주장보다 우수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나의 주장이 더 나은 주장에 의하여 극복되기를 기대한다. 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고집하는 것보다, 우리 모두의 삶이 보다 폭넓은 삶에 대한 이해와 보다 나은 생각에 의하여 개선되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믿으며 살아왔기에 그렇다. 되돌아보면 실패와 오류투성이로 점철된 것이 나의 지난 날들 이었다. 하지만 비록 실패하였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면 내가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했기에 진실은 실수에서 훨씬 분명하게 발견되기도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써 놓은 글을 다시 살펴 보면 아쉬운 점과 부족한 점이 항상 눈에 띈다. 나는 글 쓰기를 통하여 이러한 나의 부족한 점들이 점차로 개선되기를 기대하며, 가능하면 반성적인 태도로 글을 쓰려 애쓴다.

 

내가 아는 한 成人의 경우,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는다. 자기 주장을 지키고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의 주장에 의하여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란 여간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작가가 한 권의 책에서 한 줄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확실하게 던질 수 있으면 성공적이라 생각한다. 가능하면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주장으로부터 나의 삶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배우려 노력한다. 진실은 명백하며, 진리는 억압이 없다면 스스로를 알린다는 사실을 믿는다. 내가 살아온 삶의 진실에 비례하여, 보다 가치 있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나의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과 노력의 크기만큼 우리 현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을 배워왔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 대한 참된 애정과 용기와 헌신의 크기만큼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은 무질서와 혼돈의 세상이란 생각을 해본다. 잘못 살아온 과거의 누적된 사회구조적 모순과 방향성을 상실한 채 진행되는 개혁이 우리사회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가치관의 혼란과 삶의 불확실성이 문제투성이의 잘못된 정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변화, 무엇보다 급속하게 변화되는 과학기술의 변화는, 유행의 변화를 촉진시키고, 미적 기준 이나 嗜好의 혼란을 야기시키며, 끊임없이 새 것을 추구하게 하고, 삶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게 하며, 실속 없는 새로운 것으로 변화욕구를 자극한다. 삶은 점점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지고 살아가면서 자신감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점차로 어려운 것처럼 여겨진다. TV가 주요 재산목록으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3년 묵은 컴퓨터를 재산이라 여기는 사람은 없다. 새로운 제품이 점점 빠른 속도로 나오게 되면 이에 따라 물질적 재산에 대한 집착이 약해지고 나아가 정신적 자산이나 신념에 대한 집착도 희미해진다. 어떠한 사상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도 유행의 변화 속도에 적응하게 된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쏟아지는 엄청난 정보 앞에서 현대인은 일찍이 없었던 생활감정의 격동적 변화에 대응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불확실성 때문에 사람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이로 인하여 노예제도가 존속되고,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을 기를 수 없게 된다. 우리 앞에 놓여진 거짓과 삶의 오류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보다 나은 삶을 모색하려는 합리적은 통찰은 그 무엇보다 용기를 필요로 한다. 스스로의 삶을 이성적으로 이끌려는 용기 없이 우리의 삶은 합리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 무지와 오류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와 서로 다른 계층과 집단 세대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으로 우리 스스로의 행복을 짓밟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에 대하여,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이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반성적 지성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라 믿는다.

 

칸트는 <계몽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란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계몽주의는 인간 스스로가 부과한 미성년으로부터의 탈출이다. 미성년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悟性을 사용할 수 없다. 그가 자신의 悟性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지도가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悟性에 입각하여 살아가려는 용기와 결단력의 부족에 있다. 이러한 게으름과 비겁은 그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기꺼이 미성년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며,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고, 자신들의 삶을 지도자에게 예속시키는 이유이다.>

 

건전한 이성은 우리들의 삶이 상황이나 원칙에 치우침 없이, 합리적이며 성공적으로 우리들의 삶을 개선하도록 이끈다. 혼돈과 미망의 불확실성의 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하여서는, 우리 스스로 깨어 있는 정신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삶의 현실을 직시하려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를 만들기 위하여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불확실성이 우리들의 삶을 억압하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 앞에 놓여진 우리들의 삶에 대한 개선은 우리의 삶의 상황과 우리의 역량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해야할 바를 찾아내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불확실한 우리의 현실에서, 사람들에게 보다 정돈된 시각으로 이성과 합리성에 기초하여 우리들의 삶과 현실상황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글을 쓴다.

 

헤겔은 그의 <美學>에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정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먼저, 기존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항의하고 이의를 제기하며 둘째, 기존의 사회조직에 진실되고 견고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셋째, 그 사회조직과 화해하고 실생활에서 적극적 역할을 맡으나 넷째, 혼란스러운 현실의 散文性을 말소하고, 예술의 아름다움에 더욱 접근하는 정형화된 詩性을 도출하는 정신이라 말하고 있다.

 

경제성장과 획일성만을 강조하며, 줄 세우기와 편 가르기로, 분열과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였던 독단적이고 정당하지 못했던 잘못된 사회운영방식을 뛰어넘어, 우리 모두가 화해하고 협력하는 새로운 사회질서, 국가질서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청된다 할 것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고갈된 자원인 <사회적 연대성>을 회복하는 길은 민주주의적 헌정질서를 확립하고, 참된 의미의 법치주의 국가질서를 확립하며, 이를 위하여, 헌법이념이 일상생활에서 구현되기 위한 법전체계의 정비가 시급하다고 믿는다. 독재정치를 혐오하고 살아왔다. 진정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세상, 우리 모두가 화해와 협력으로 함께 손잡고 우리의 미래를 개척하는 새로운 국가질서 만들기 위해, 내 생을 던져 공부하고 노력해 왔다.

 

힘있는 자의 횡포와 국가권력의 횡포에 맞서 끊임없이 싸워왔다. 합리성과 이성이 존중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그러한 세상을 가꾸어가기 위하여,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내 스스로는 떳떳하고 당당한 삶을 살아왔다. 나의 정신은 무지와 편견과 독단에 항거하는 나의 칼이다. 이성은 항상 정의와 평화, 인류의 복지의 편에 서서 결단한다. 정의는 끝끝내 승리하고야 만다는 희망의 증거가 되기 위해 글을 쓴다. 이제는 잊혀져 아무도 믿는 이 없을 것 같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잃어버린 전설을 보다 많은 사람들의 신념으로 되살리기 위해 내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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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06 14:22:53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3 짜리 딸 아이 책상 앞에 인터넷에서 퍼온 글인 것 같은 몇가지 표어들이 붙어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라도 성공은 성적 순이다>라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개 같이 공부하여 정승같이 놀자>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은 책장을 넘기고 있다.>라는 말을 보면서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성적이 나빠도 행복할 수 있다. 성적이 반드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성적이 나빠도 남 달리 좋은 성품을 가질 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남들 보기에 성공하지 못하였어도 오히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행복은 주관적이고 심리학적 테제라면, 성적은 객관적이고 사회학적 테제이다. 서로 다른 성격의 테제를 비교하는 것이 잘못되었기에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성적으로 행복의 척도를 가늠하려는 시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다.

 

성공는 성적순일까? 학교성적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고, 학교에서의 교육평가가 한 개인의 능력과 자질 나아가 그 사람이 갖는 잠재적 발전 가능성을 평가하는 데에 충분하지 못하다. 학교 성적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한 평가를 보여준다. 학교의 교과과정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서, 특정한 싯점의 개인의 능력과 성실성에 대한 평가이다. 성적이 한 개인의 삶을 평가하는 데에 턱없이 부족하다. 정답이 있는 문제를 얼마만한 연습을 통하여 보다 잘 해결하는가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학교에서는 아무리 전문적인 교육을 받는다 할지라도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몇 몇의 지식들과 연습문제를 습득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실질적인 삶의 상황이란 정답이 주어진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교육은 주어진 문제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해결하는 것만을 가르친다. 학교교육의 한계는 실패를 가르치지 못하는 데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성공만을 가르치려 한다. 성공보다 중요한 것이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 나는 아이들에게 성공을 가르치기 앞서 실패를 극복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믿는다.

 

진정 성공적인 삶은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고 이를 극복하여야 성취할 수 있다. 삶의 상황은 우리가 생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엄청나다. 우리는 우등생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승승장구하는 성공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조그만 삶의 좌절 앞에서 쉽사리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공만을 배운 사람은 나약한 인간이기 쉽다. 실패를 통하여 실패를 딛고 일어난 성공이 보다 값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고 그러한 직책을 통하여 보다 중요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학습할 기회를 얻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공적인 사회적 경력은 남들보다 보다 나은 업무능력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경력을 통하여 일에 대한 책임감, 다른 구성원들과의 업무의 협력을 통한 조직의 활성화 등을 통하여 사회조직을 이끌어갈 리더쉽을 체험하며 학습한다. 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의 과정은, 다른 사람과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조직과 끊임 없이 갈등하며 화해하고, 경쟁하며 협력하는 관계를 지속하면서 성취한다. 한 사회조직 내에서의 한 개인의 성공이란 전체조직의 발전을 위한 보다 긍정적이고 중요한 일을 성취함으로써 이룩된다. 한 개인의 사회적 성공은 원론적으로 그 개인이 사회발전에 얼마만큼 기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한 개인의 성공이 그 사회에 대한 기여도로 평가되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이다. 성공은 성실성과 책임감 조직에 대한 헌신도, 탁월한 업무능력 등으로 결정된다.

 

당연히 성공은 성적 순이 아니다. 개같이 공부하여 정승같이 놀아지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다. 개같이 벌면 정승같이 쓸 수 없다. 개같이 벌면 개같이 망가지는 것이, 지은 대로 받는 그리고 뿌린 대로 거두는 삶의 이치이다. 진정한 성공은 내가 남을 이기는 것이 성공이 아니고, 보다 높은 책임감과 남들과 더불어 함께 일하는 협동심,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과 헌신적 노력을 통하여 비로소 참된 성공이 가능하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어 돈이란 많을수록 부족하고, 지위가 높을수록 더 높은 지위를 탐하는 것이 요즈음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人之常情이 아닌가 싶다. 모든 불행은 자신에 대한 집착과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어야 하고, 내가 대접을 받는 사람이어야 하며, 내가 남들보다 보다 풍요로운 삶을 누려한다고 집착하는 데에서 불행한 삶이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면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 대우를 받고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존경받고 남에게 대접받고 대우받는 것이 좋은 일일까?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인기인이 신나고 좋은 일이기만 할까?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는 것이기에 대다수의 사람의 경우 돈은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부족하다. 명예를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존경을 신경 쓰고, 자신의 잘났음을 폼을 잡기 시작하면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란다. 교만해지고 자신의 관점으로 사람과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자신의 판단이 최선이고 옳다고 고집하게 된다. 사람은 이렇게 스스로 어리석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자신의 멋대로 세상이 움직여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 뜻에 따라야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에 대한 세상에 대한 이해의 범위가 제한된다. 탐욕과 교만은 자신에 대한 이기심과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자신을 병적으로 만든다. 자신 스스로 자기 마음대로 다루기 어려운 것인데 남의 생각이나 행동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바란다면 이는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스트레스 인자를 만드는 어리석음일 것이다. 이것이 성공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이유이다. 자신의 삶의 실현을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풍요로움의 과시, 다른 사람들의 대우나 인기에 의존하는 것은 거짓된 삶의 표식이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적인 삶이란 자신이 가진 보편적 인간성을 보다 확장하여 실현하는 것이다.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위하여 나눌 수 있을 때, 힘센 자가 약한 자를 보호하고 지켜줄 때,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일깨워 줄 때, 참된 의미의 보편적 인간성은 실현된다.

 

사람은 사회적 성취를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인간성을 실현해 간다. 사랑 받기 위해서 사랑하여야 하는 것처럼, 존경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자신만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업신 여기면서 남의 존중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존중해야 하는 의무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 받을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참된 의미의 사회적 성공이란 남들은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것을 책임지려는 행위의 영광을 통하여, 내가 그 누구보다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르게 깨달을 때 사회적 성공은 인간을 참된 의미의 행복의 길로 인도한다.

 

현재의 자신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은 건전하고 활력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이다. 향상되는 삶이 건강한 삶이다.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부족함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배울 수 있는 삶이 건강한 삶이다. 성공한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행복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보다 훨씬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것은 분명하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내 스스로를 일깨우며 산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일깨운다. 정직하지 못하면 부족함을 인정할 수 없고, 부족함을 인정할 수 없으면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배우지 못하면 발전할 수 없고 발전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사는 것이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어진 삶에 그리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삶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행복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배웠기에...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내 마음을 가다듬으며 살아간다. 생활 속에 음악이 있고 노래가 있어 더 좋은 그런 나날이고 싶다.

 

내가 살아가는 날들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속에서 감사하는 마음과 행복을 찾아가면서, 남들에게 힘과 용기가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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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19 12:10:14

 

중학교 다니는 한 학생에게 에게 물어봤다. 국어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인데 무엇이 제일 어렵냐고 물어 보았다. 쓰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디국에서 글을 쓰는 40대 논객에게 똑 같은 질문을 했다. 그는 듣기가 제일 어렵다 말했다. 곰곰히 생각하면 무엇하나 쉬운 것이 없고 제대로 하자면, 한결같이 어렵다는 생각이다. 최근 디국에서 글을 쓰고, 댓 글을 달다가 여러 번 곤욕을 치루었다. 생각보다 많은 량의 글을 써야 했고, 댓 글도 달아주어야 한다 생각한 것이 지나친 욕심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업량은 과중한데, 내 의도를 읽으려 하지 아니하고, 나와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말꼬투리를 잡으려 하는 것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글을 쓰는 것은 쓰기인데 댓글 다는 것은 말하기와 쓰기의 형태가 뒤섞인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란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은 느낌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인터넷 채팅으로 여겨지는 댓글을 다는 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문제점을 정리하고, 보다 원활한 대화의 방식을 모색해 보려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쓴이가 어떤 주장을 하면 그 문제점을 찾아내어, 이를 비판하고 논의하는 것이 댓글 방식의 대화의 중심을 이룬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싸워 이기겠다는 의도로 댓글을 단다. 나는 이 자체가 잘못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의 주장이 자신과 다르면 질문하여 이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토론과 논의의 주안점은 자신이 주장이 남의 그것보다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와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논의를 통하여,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공동의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보다 말이 잘 통하는 사회로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이해하고 협력하며 화해하는 문화적 풍토를 가꾸어 가는데 있다고 믿는다.

 

 

하나의 글은 독자 개개인의 기호나 관심, 취향을 겨냥하지 않고 쓰여진다.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 의도하는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다. 최근 내가 쓴 글들은 우리사회에서 정치적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정치적 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결정과정에서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의 결정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겼고, 정책결정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이나 정부의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의도로 글을 써 왔다.

 

 

이러한 나의 태도에 몹시 거부감을 표시하는 몇몇 독자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분명히 밝힐 것이 있다. 나는 독자들의 환심을 사거나 인기를 얻고자 글을 쓰지 않는다. 내가 어떠한 스타일로 어떤 글을 쓰느냐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자유의 영역이다. 물론 어떤 분이 성실하게, 나의 문제점을 지적하여주고 개선책을 제시해 주신다면 더 할 나위 없는 고마움으로 독자들의 충고와 그 기대를 충족해 드리기 위해 가능한 노력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견해가 자신들의 견해와 다르다 하여, 또 내 글의 스타일이나 말하는 방식에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안는다 하여, 시비거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시간을 허비하여 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말해 주고 싶다.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삶의 평가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개인적인 신념으로 사회발전에 기대하려는 의도로 글을 쓴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에 대하여,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성실하게 글을 쓰는 것이 내가 가장 효과적으로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이라 믿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체험에 대한 이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가능한 의미체계로 만들어 형상화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공적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작가라면 자신만의 문체(Style)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말하기란 자신의 의도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오해로, 전달할 때 가능하다. 작가가 논리적으로 통일된 자신의 표현기법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대응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Style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일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예술의 분야에서 성공적인 예술적 형상화의 전제가 된다. 작가가 自信을 갖고 작업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세계관에 기초한 이러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좋은 작품은 작품 내부에 통일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스타일의 문제는 단지 예술의 영역에서 만이 논의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자신의 옷차림이나 화장이나 액세서리등의 조화된 이미지로 코다네이션할 수 있는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것은 그녀에게 그녀 나름의 스타일을 소화하고 연출할 능력을 가진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매력적인 성격이나, 사람을 대할 때의 예의 바른 태도 또한 스타일과 관련되어 있다.

 

 

예의 바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이다. 예의란 나의 주장을 내세우려는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상대방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상대방에 대한 미리 예단하지 아니하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몇 마디 말이나 몇 가지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애정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고,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보다 많이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의도는 이렇게 이해됩니다. 내가 당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을 당신이 찾도록 도와주실 수 없는가 하는 식의 상호존중의 방식의 인간관계에서의 신뢰의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성공적인 말하기란 자기 자신의 신념체계를 자신과 다른 신념체계를 가지고 사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하여, 자신의 견해를 바로잡고 보다 발전되고 개선된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데 있다. 그러하기에 성공적인 대화와 성공적인 인간관계는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업그래이드 하는 계기를 만든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만나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방식의 삶을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개선의 가능성과 만난다는 것을 훨씬 더 유익하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때론 스스로 열등감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나아가 우리의 문화발전을 위해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에서 반성적 지성, 깨어 있는 의식이 갖는 중요성을 보다 바르게 인식하길 기대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좌절하고 가장 고통스러워할 때, 나의 의식은 가장 치열했고 그러한 고통을 통하여 성장해왔음을 기억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드높은 자존심은 부족함을 고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한다. 나아가 반성이 고차원으로 올라가면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는 폭은 향상된다. 오랫동안 지시와 하달만이 있고, 이의 제기나 질문이, 상사에 대한 괘씸죄로 비난 받는 그릇된 문화풍토에 살아오면서, 질문할 줄 모르는 것이 우리의 문화풍토이다. 지난 십 수년 민주화 과정이 자신과의 반대의 견해에 떼를 쓰고 돌을 던지는 그릇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에서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의 문화, 토론의 문화는 싹을 피우지 못했다. 무엇보다 인간존중의 문화적 토양이 갖추어져야 만이 민주주의는 꽃피울 수 있다. 너 나 할 것이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했음을 반성해야 할 싯점이라 믿는다. 인간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듯이, 남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내 스스로의 삶을 반성적으로 되돌아 보며 배워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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