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를 넘어서야
2005-02-28 18:49:15
지금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절실한 과제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경제살리기를 말한다. 하지만 경제문제도 보다 근원적 이유를 캐내보면 계층과 집단, 지역과 세대 간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취약한 정권 기반에서 시작한 노무현 정권은 지난해 대통령 탄핵과 4.15총선을 거쳐 집권기반을 강화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노대통령의 이러한 집권기반 강화 전략 나아가 현 정권의 개혁이 국론분열을 야기하였고,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대립과 갈등을 증폭시킨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지도력 강화를 위하여 정권기반을 강화하기 노대통령의 개혁을 위한 전략이 지금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노대통령의 지도력을 위협하고 있다. 결국 개혁 대 반 개혁으로 지지기반을 강화하려는 현 정권의 정치적 의도가 국론 분열과 사회갈등을 고조시킨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출범 3년차를 시작하는 노무현 정권에게 그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국민 통합의 리더쉽일 것이다.
현 정권을 좌파정권이며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식의 계급갈등을 촉발하는 야당의 현 정권에 대한 대안부재의 정치공세는 단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 수호를 위한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현 정권의 개혁 또한 현 정권의 개혁이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이 없는 기득권 빼앗기 식의 자신들의 집권기반을 강화시키기 위한 또 다른 의미의 이데올로기에서 추진되는 것이며, 국민화합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 사회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계급 당파적 관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사회의 갈등과 대립구도는 분명히 이데올로기的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갈등 요인에 대하여 與野할 것 없이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만이 생각이 객관적이라 절대화하는 것은 정신적 미숙의 증거이다. 여야할 것 없이 대립하는 정치집단의 주장과 정책이라는 것은 자신들의 권력획득이나 권력강화에 연관되어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주장의 범주와 한계 나아가 포기할 조건을 이해함으로써 나아가 상호존중에 기초한 대화와 협력을 통해서만이 우리 사회의 정치발전과 사회적 연대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ideology)라는 말이 18C 프랑스에서 처음 쓰여졌을 때, 그것은 인간이 가진 관념이나 사상을 연구하는 학문(the study of ideas)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이데올로기는 사회에 대한 사상 또는 지식(ideas about society)을 뜻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고, 오늘날 사용되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때로는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당파적 이해에 기초한 현실에 대한 삐뚜러지고 왜곡된 사상이나 지식이라는 부정적 의미의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정당이나 그 밖의 정치적 조직체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이론으로 생각되어 왔다. 정당과 같은 정치 조직체들은 일정한 계급이나 계층 그리고 특정 세력에 지지를 호소한다. 이데올로기는 무엇보다 설득과 행동의 유도를 목적으로 하는 규범적 진술이기 때문이다. 정당의 정책이나 이념이 매력적인 것이라면 그 정당이 주장하는 정책은 지지세력의 利害와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정당의 主義, 主張이나 정책이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문제는 특정 정당이나 정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지나치게 왜곡하거나 단순화시키거나 왜곡시켜 부각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는 데에 있다. 지난해 연세대에서 행한 <보수는 무조건 바꾸지 말자>고 말하는 식의 노대통령의 발언이나, 현 정권을 단순히 반미 친북의 빨갱이로 매도하려는 극우적이며 사회발전에 반동적 집단의 주장은 이데올로기의 대결의 양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좌우익으로 갈라져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신념 및 사상체계를 갖추게 되고, 반대파의 이데올로기를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찬 왜곡된 사상으로 규정하고 배척한다. 대립하는 정치집단은 자신들만의 생각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상대방의 주장은 기만적인 허위의식이라 비난한다.
다니엘 벨(Daniel Bell)이 ‘西歐에서의 이데올로기 종언’ (The end of ideology)을 주장했을 때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극단적 정치이데올로기를 말하는 것이다. 다니엘 벨은 에드워즈 쉴즈(Edward Shils), 로버트 하버(Robert A. Harber) 등과 함께 혁명을 통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적 허구가 서구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강조한 이데올로기 終焉論者이다. 이데올로기 종언론자들은 이데올로기 종언론의 근거로, 첫째, 서방세계에서 지난 수 십년 동안 민중봉기, 혁명 통한 인민의 천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허구임이 드러났으며, 둘째,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민중의 위한 정치제도로 부적합함에 대한 평가가 내려졌고, 셋째, 이데올로기에 힘을 제공하였던 계급 간의 갈등이나 빈부 격차에 대한 불만이 상당히 해소되었으며, 넷째, 다양한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현대사회가 단순한 합리주의나 과학적 신념에 의한 사회공학을 통해, 하루 아침에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가 건설될 수 있다고 믿는 지식인이나 과학자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그 이유로 말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이론에 최초로 체계 있는 이론적 성격을 부여한 마르크스(Karl Marx)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으로 보고, 모든 이데올로기적 신념이나 이론을 배척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자본주의 사회체제의 현상을 유지를 꾀하는 선택적이고 왜곡된 사상이라 규정하였다.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지배층, 부르죠아의 지위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허구적 사회사상이라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사상의 불완전성을 폭로하고 정치적, 도덕적, 법적 이데올로기는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확보에 필요한 도구일 뿐임을 지적한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의 원천이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불합리성에서 기인한다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의식은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유물론에 입각한 것이다. 의식이 존재에 의해 결정된다는 명제가 사실이라면 허위의식의 근원은 사회구조에 있고, 따라서 사회구조가 합리적으로 개선되면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르기는 극복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서의 인간의 모든 지식과 이념은 허위의식에 지나지 않지만 끝내는 역사적 필연성에 의하여 인간지식이 이데올로기성(허구성)을 극복하고 참된 의식과 지식을 찾게 될 것이라 믿었다.
칼 만하임(Karl Manheim)은 그의 저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Ideologie und Utopie>에서, 이데올로기를 명확히 구별되는 두 가지 의미, <이데올로기의 特殊性>과 <이데올로기의 全體性>의 의미로 파악한다.
이데올로기의 특수성이란 우리가 우리들의 상대방이 표명하는 이념과 관념들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정치적 반대자들의 주장이란 현상과 본질을 의식적으로 은폐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러하기에 사회현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란 상대방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왜곡행위는, 의식적인 거짓말에서부터, 부지불식 간에 저지르는 은폐, 치밀하게 상대방을 속이는 것으로부터 자기기만에 이르기까지 수 없이 많다. 거짓말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개별적 분화되고 발전되어 온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특수한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전체성이란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 구체적 역사적 사회적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데, 이데올로기의 전체성이란 시대 또는 계급집단이 지니는 전체적 의식구조의 특성과 성향이다. 예를 박정희가 생각한 국가발전이란 국가의 총생산의 증가가 국가의 발전이라는 여기는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이다. 개발독재 시대의 성공하는 인간의 의식이란 출세하기 위하여서는 줄 잘 서고 힘있는 자에게 빌붙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고 자신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 믿고 살아온 것이다.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의 특수성과 전체성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한다.
두 개념이 지니는 공통점은, 상대방이 주장하는 의미와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어떠한 정치집단의 주장이나 개인의 주장을 이해함에 있어, 그 주체의 사회적 존재를 이해함으로써, 그의 주장이 아닌 말하는 주체의 삶의 조건에 의하여 그의 주장을 이해하려 한다. 따라서 그 주체가 주장하고 표명하는 이념은 그의 존재의 기능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떤 사람의 의견, 진술, 제의, 사상체계는 그가 말하는 외형상으로 드러난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상황의 견지에서 해석된다. 예컨데, 당연한 귀결로 열린우리당 당원은 열린우리당의 이데올로기를, 한나라당 당원은 한나라당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하게 사고하고 주장한다. 나아가 주체의 특정한 성격 및 의식구조도 존재가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의 의견이나 현실인식이 영향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보유하는 사람의 삶의 기능이 되기도 하고, 사회에서 그가 점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나 지위의 기능이 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의 특수성과 전체성에는 현격한 차이점도 있다.
이데올르기의 특수성은 상대방이 이데올로기라고 주장 것의 일부만을 지칭하고, 그 주장의 내용을 문제삼는 반면에, 이데올로기 전체성은 상대방의 전체적인 세계관을 문제 삼으며 상대방의 주장이란 상대방 참여하거나 지지하는 집단의 집단적 의식이 소산으로 이해하려 한다. 예를 들면 이라크 파병을 반전운동이나 친미행위로 보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특수성의 문제이고, 노빠는 말 뿐인 기만적 개혁으로 현실 파괴적이라 비난하고, 딴빠는 사회발전과 개혁에 반대하여 오로지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에 연연하는 수구 꼴통이라는 식의 상대방의 세계관과 삶의 태도에 대한 비난은 이데올로기의 전체성의 문제이다.
인간의 모든 사상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자신이 처한 사회환경에 구속받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된 왜곡된 사상일 수 밖에 없다는 만하임의 초기 견해는 이 후, 인간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와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자신의 지식이 왜곡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다른 사람과 개방적인 지적 교류를 통하여 객관적이고 타당성 있는 지식이 정립 가능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만하임의 이러한 변화는 보다 객관성과 타당성을 갖는 지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노력으로 평가된다.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논의 자체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그럼에도 우리 현실은, 우리 사회의 갈등구조는 여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계급모순과 민족 모순을 극복을 염두에 둔 현 집권 세력의 개혁과 현실인식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현 집권 세력이 사회주의 정부의 수립을 기획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2년 간 보여준 현 집권 세력의 행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거하여 기득권 세력의 기득권을 박탈하거나 제제하는 것이 사회정의를 위하는 것이라는 믿는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야당의 일각에서는 현 정부를 좌파정부이고 빨갱이로 매도하며 사회발전을 위한 개혁마저도 거부하는 수구적이며 사회발전에 반동적인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세력이 여전히 상존하는 것이 안타까운 우리의 현실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의 우리 사회가 좌우익으로 갈라져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신념 및 사상체계를 갖추게 되고, 반대파의 이데올로기를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찬 왜곡된 사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현실을 우려한다. 이러한 현실이 있게 된 사회역사적 배경에 오랜 세월 독재 정치문화에 젖어, 나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며, 독선적이고 배타적으로 잘못 살아온 우리들의 삶이 있다. 나는 우리들 스스로 옳다고 믿고 있는 정치적 신념이나 가치들이 우리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데올로기론이 말하는 허위의식에 젖어 있다고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국민화합을 위해, 통합의 리더쉽이 절실히 아쉬운 싯점이다. 하지만 통합의 리더쉽 못지 않게 우리들 스스로 실천해야할 시대적 과제가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의 삶 깊숙이 침투해 있는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을 우리 스스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아쉬운 때가 아닐까? 우리들 스스로 노빠와 딴빠로 대립하여 우리들 스스로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반목하며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옛 성현이 이르기를, 나만이 옳고 남은 그르다 말한다면 그르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이라 말했었다. 자신의 주장만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정신적 미숙을 토로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성숙한 인격은 스스로의 주장이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개방성을 견지하고, 스스로 끊임없이 반성하고 학습한다. 반성하며 학습하는 개인만이 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것처럼, 반성하고 학습하는 사회만이 새로운 역사적 도약을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사회가 진정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고 상호존중을 통한 국민화해를 이룩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결집된 국민적 역량을 발휘하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의 성원들이, 그리고 우리의 문화에서 반성적 지성이 갖는 가치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참된 의미의 지성은 지성에 의하여 알 수 있는 것보다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이해한다. 사람은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인간실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스스로의 부족함에 대한 이해 또한 깊어진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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