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청산과 국가정체성
2004-08-18 17:05:30
열린우리당 신기남(辛基南) 의장은 오는 19일 영등포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의장직 사퇴를 공식 발표한다. 열린우리당 핵심관계자는 18일 "신 의장이 선친의 일제하 헌병 복무 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기로 마음을 굳혔고, 이같은 심경을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와 당 중진들에게 전달했다"며 "신 의장이 19일 오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사퇴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중앙일보 8월 18일)
역사청산 친일청산을 소리 높여 외쳐 왔던 열린우리당 신기남 당의장의 부친이 일본군 헌병으로 자행한 과거 친일행적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신의장의 거짓말과 낯 간지러운 변명이 보도되었다. 신의장이 부친의 과거 행적에 대하여 광복회를 찾아가 사과하고, 당 의장직을 사퇴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헌법 제13조 3항 <모든 국민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상의 기본권을 모를 리 없는 변호사인 신씨가 헌법 상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을 바라보며, 친일청산의 진행 방향이 여론 몰이 식 인민재판으로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게 한다.
17일 노 대통령이 신의장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개인적으로 고통스럽겠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처신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신 의장="어떤 경우에도 대통령 뜻을 거스르는 결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신 의장은 노 대통령과 통화한 뒤 바로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로 출연했다. "현재로서 거취를 표명할 단계는 아니다. 국민 여론도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 당원동지들의 뜻이 있기 때문에 가볍게 처신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며칠 전 8.15경축사의 노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우리에게는 애국선열에 대한 존경만큼이나 얼굴을 들기 어려운 부끄러움이 남아있습니다. 광복 예순 돌을 앞둔 지금도 친일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했고, 역사의 진실마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애국선열들이 하나뿐인 목숨까지 내놓고 투쟁했던 그 시간에 민족을 배반하고 식민통치를 앞장서 대변했던 친일행위가 여전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습니다. 더욱 부끄러운 일은, 역사의 바른 길을 걸어 온 독립투사와 그 후손들은 광복 후에도 가난과 소외에 시달리고, 오히려 친일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으로 행세하면서 애국지사와 후손들을 박해하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친일문제 규명이 역사 바로 세우기라 말했었다.
이는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어쩌면 새로운 국가질서를 만들겠다는 중차대한 국가의 대사이다. 신기남의장의 헤프닝은 현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얼마나 어설프게 진행되는, 정략적 의도로 진행되는 한심한 작태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하려면 그에 합당한 준비가 뒷바침 되어야 한다. 남을 다스리는 자는 먼저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실언과 말바꾸기를 버릇처럼 해온 노대통령에게 상당한 수양을 한 인격자의 수준의 자제력을 기대하지 않는다. 적어도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무모한 짓을 해서는 안되고,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며, 될 일 안 될 일 정도는 분간할 정도의 사리분별을 기대하는 것이다. 어떤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을 판단할 정도의 사람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에 이를 요구하는 것이 지나친 요구일까? 어찌 신기남씨와 같은 이와 더불어 친일청산을 말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려했는가?
여권 고위관계자는 신기남의장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신 의장을 여론의 비난에서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친일 문제를 규명하는 중심을 세우는 게 더 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신 의장도 친일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했으니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도 협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8월 18일)
역사는 현재를 위해서 쓰는 것이다. 현재의 과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과거 역사의 해석은 달라진다. 죽어 있는 과거에 생명을 불어 넣고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아주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이다. 그리고 역사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 史觀이다. 올바른 사관은 우리를 밝은 미래로 인도하고, 잘못된 사관은 자칫 역사에 올가미를 씌우고 우리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이끌어 갈 수 있다.
노대통령은 8.15경축사에서 친일 청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진상이라도 명확히 밝혀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올바른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사는 미래를 창조해나가는 뿌리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걱정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화합하고 포용하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왜 진실을 밝히는 일에 의견이 갈리고 대립이 있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진실은 합심해서 밝혀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밝혀져서 부끄러운 일이 있다 해도 회피할 일이 아닙니다. 밝힐 것은 밝히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합니다. 그 토대 위에서 용서하고 화해할 때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진실을 밝히는 일에 의견의 갈리고 대립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관점에 대하여 현 정권은 그 관점을 밝히지 않고 있다. 현 정권이 생각하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입장과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처한 현재의 국가적 과제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친일의 과거사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이 납득할 만한 관점을 밝히지 아니하고, 과거사를 규명한다 말한다. 이는 현 정권이 민중적 관점, 계급적 당파적 이데올로기에서 바라본 과거사를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득권 세력을 궤멸시키려 획책하려는 것으로 보여진다. 현 정권이 친일의 과거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일까? 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사대 매국노 세력을 척결하는 방식으로 반제국주의 민족 자주화 운동의 차원에서 친일 과거사를 규명하려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는 과거의 문제를 들추어 친일 세력을 궤멸시키고 파괴하려 한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것은, 현 정권의 친일 규명의 의도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제국주의침략세력과 사대 매국노 세력을 척결하는 데에 방향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50여 년 이룩해 온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대한민국의 기득권 세력을 친일파의 잔당과 미제국주의자의 추종세력 규정하고, 이들을 척결하는 것이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과거사 청산의 목적으로 여겨진다.
신기남 의장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바라보면서,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란 진정성도 우리가 처한 현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시대적 과제를 바르게 설정하지 아니하고, 민족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친일 기득권 세력을 축출하는 민족해방전술전략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게 한다. 현 정권의 과거청산이 대한민국의 헌정질서의 범위에서 진행되는 것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을 위한 사회주의 혁명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인가를 묻겠다.
노대통령에 묻겠다. 현 정권이 국가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있기나 한가? <내 마음이 헌법정신>이라는 노대통령의 발언이 사회주의혁명 방식의 개혁을 은폐하기 위한 발언은 아닌가 다시 묻겠다. 집권기반의 강화와 기득권층을 완전히 궤멸시킬 때가지, 정략적 술수로 국민을 기망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얄팍한 재주가 얼마나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는가 묻고 싶다. 일시적으로 국민은 속이고 현혹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임수가 얼마나 가겠는가? 일시적으로 어떠한 국면에서 국민을 속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임수는 결코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백성을 하늘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이다. 백성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고, 스스로 자신을 속이면서 속이는 줄 모르고, 죄를 지으면서 죄를 짓는 줄 모른다. 속일수록 감출수록 죄는 자라나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治者가 되어서 성명을 온전히 보존하려면 마땅히 백성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治者가 되어서 백성을 속이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죄를 하늘에서 얻는 것이니, 빌어도 소용이 없다 하였거늘, 어찌 하늘이 두려운 줄 모른단 말인가?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 잡고자 하려는 노력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과거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우리의 관점이 현실 인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우리의 현대사의 발전방향을 설정하고 있느냐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대답을 가지지 못한 과거사의 청산이란 한 마디로 語不成說이라 할 것이다. 역사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정한다면, 역사발전의 매 단계마다의 각 位相들은 어떠한 의미와 연관성을 가지고 차례 차례 전개되는 것이어야 한다. 발전의 모든 단계는 그 앞 단계에 의해서 조건 지워지거나,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려 진행된다는 데에 대한 가시적인 言明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왜냐>하고 질문하기 위하여서는, 동시에 우리가 현 싯점에서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에 대한 대답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은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 바로 세우기를 말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의 확립에 대한 노력은 없다. 미래에 대한 비젼의 제시 또한 찾아 볼 수 없다. 현 정권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말하기 앞서, 현 정권이 생각하는 국가정체성을 밝혀야 한다. 막연한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뿌리를 찾는 역사를 바로 세우기에 그쳐서는 역사가 바로 설 수 없다. 기득권층으로부터 기득권을 빼앗으려는 의도로,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을 위한 사회주의 혁명 차원에서의 과거청산을 행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를 갈갈이 찢는 것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의 존립 기반을 허무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이끄는 친일 과거사의 규명이라는 것을 온 국민은 바르게 직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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