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0-01 16:42:46
1.
내 개인적 견해로 대한민국 헌법 중에서 가장 제대로 된 헌법은 대통령 4년 중임을 말하고 있는, 1962년 12월 26일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이다. 대통령 중임제는 선거에 의하여 국민이 대통령을 해임할 수 있는 장치를 보장한 헌법이다. 또 대통령 임기 5년, 국회의원 임기가 4년이어서 이로 인한 국정의 혼란이 야기되는 현행 헌법과는 달리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같은 시기에 이루어져 代議민주주의 이념과 책임정치를 조화시킨 헌법이라 평가한다.
이처럼 박정희는 시작은 좋았다. 1968년 12월 5일 공표된 국민교육헌장은, 건전한 민족주의적 국가관에 입각하여 민족 정통성과 국가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힘썼고,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던 사회관을 강조하고 있다. 요즘 경제 타령만 하며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물질만능, 경제 제일주의에 젖어 있는 한나라당 의원들과 지지자들에게 정독을 권하고 싶다.
2. 국민교육헌장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 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 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 상조의 전통을 이어 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 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 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 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12월 5일 대통령 박정희
국민교육헌장이 제정된 이유는
첫째, 조상의 훌륭한 전통과 유산이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있으며, 둘째, 물량적 발전에 비하여 정신적 가치관 사이의 조화로운 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고, 셋째, 국민의 국가의식과 사회의식이 결여되어 민족 주체성이 결핍되어 있으며, 넷째, 국민교육의 지표가 불분명하여 학교교육에서 정신적 •도덕적 교육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시대적 •환경적 여건의 불합리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헌장은 개인 •사회 •국가의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시키고 앞으로 국민이나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국민교육헌장’은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등 모든 교육의 근본 지표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헌장은 초장에서 한민족의 긍지와 사명의식을, 중장에서는 생활의 규범 •덕목을, 종장에서는 조국통일의 실현과 민주주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헌장의 기본정신은 ① 민족주체성의 확립, ② 전통과 진보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 ③ 개인과 국가의 조화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으로 집약될 수 있다.
3. 박정희의 통치철학
박정희는 <경제제일주의>와 <조국근대화>를 구호로 내걸고, 경제건설을 위한 재원조달을 위해, 한일 국교 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에 최우선적으로 역점을 두었다. 1965년 6월 22일 한 일 협정이 체결되었다. 한 일 협정이 국회에서 비준된 8월 베트남 파병안이 국회에서 하루 먼저 비준되었다. 한 일 협정을 종용했던 미국의 강력한 파병 요청을 정부가 수락한 것이다. 정부는 파병의 대가로 이른바 ‘브라운 각서’ (1966년 3월 7일 주한 미 대사 브라운을 통하여 한국정부에 전달된 각서. 주요 내용은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 베트남 특수의 허용, 미국의 한국에 대한 신규차관 지원을 골자로 하고 있다.) 1965년부터 70년 초까지 5만 5천명의 전투병이 베트남 전에 파병되었다. <젊은 이의 피를 파는 행위>라는 야당의 비판도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장병이 희생되었으며, 고엽제로 인한 각종 후유 장애에 시달리는 환자가 있다. 베트남에는 건설업체도 진출하여 인력수출의 길이 트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그 인력과 장비가 중동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것이 한국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통치철학은 교육 문화 전반에 <주체적 민족사관>을 강조하고, 이를 교육 이념에 정착시키기 위해 국민 교육헌장을 제정하고, 학생들에게 이을 암송케 하였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은 <국가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요, 민족중흥의 시대적 사명이라는 강한 국가주의적 역사의식을 고취하였다. 이러한 국가의 발전을 우선 시 하는 박정희의 국가관은 국가가 국민을 위하여 그리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존재하여 한다는 자유주의 정치 이념에 반하는 전체주의적 국가관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민족문화 창달을 위한 민족 주체성 확립에 노력하였고, 자주 독립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이념과 자주독립적 국가관을 높이기 위해 1970년도 이후로는 국사 교육을 강화하고, 국민윤리라는 새로운 과목을 신설하였다. 문화정책면에서 일제시대에 파괴된 성곽이나 고적들을 복원하고, 이순신이나 강감찬과 같은 애국 무장들의 사당에 대한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졌다. 정부는 국학연구와 고급인력의 연수교육을 겸한 연구기관으로 1978년 한국 정신문화원을 설립하였고, 이 연구원에서는 10여 년의 작업 끝에, 27권의 방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88~1991)을 편찬하였다.
3. 타락해 가는 정치
1969년 9월 학생과 여론의 거센 반발에도 삼선 개헌을 변칙적으로 처리하여, 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 해 가을에 학생 데모가 치열해지자 위수령을 발동하고, 71년 12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만들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초강경 탄압에 나선다.
1971년은 대외적으로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고 닉슨 미국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미.중 화해가 시작되었으며, 베트남은 내전 위기에 몰려 공산화가 점쳐지는 시기였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위기와 기회로 받아들이고,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70년부터 남북교류를 제의하고, 71년에는 남북 간에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적십자대표 예비회담이 열렸다.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도중 정부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과 만나게 하고, 1972년 7월 4일 7개항으로 이루어진 남북공동성명, <통일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사상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민족 대단결을 도모한다>는 자주평화통일원칙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하였다.
국민의 놀라움과 환호를 받은 7.4 공동 성명을 계기로, 정부는 남북 대화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국민총화>와 <능률의 극대화>를 명분으로 내걸고 박정희의 영구집권과 권력강화를 위한 유신체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희 자신도 김일성과 같은 영구집권을 구상하여 만들어 낸 것이 7.4 공동성명이다.
4. 유신체제와 박정희의 종말
7.4 공동 성명 이후 남북 간에 처음으로 대화의 문이 열렸다. 8월과 9월에는 적십자회담이 서울과 평양에서 열려 이산가족 찾기 문제를 논의하고, 11월 30일에는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하였으며 남북 회담용 직통전화도 가설 되었다.
남북 해빙무드가 국민의 기대를 모으는 가운데, 10월 17일, 박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시키고,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11월 국민투표를 통하여 확정하였다. 새 헌법(유신헌법) 의해,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2395명) 선거가 실시되었고, 이어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를 8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도시에서는 대선구제, 농촌에서는 소선거구제로 선출하였고, 대통령 선출기능을 맡았는데, 실질적으로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이 되어 대통령 직속기구나 다름 없었다. 대통령 직속기구가 대통령을 선출하였던 것이 유신헌법이다. 유신헌법은 국회의원의 3분의 1은(維新政友會,유정회) 대통령이 임명하였고, 대통령이 법관에 대한 인사권도 가질 수 있게 하였으며, 대통령은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을 갖도록 하였다.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고, 국회와 사법부를 대통령이 통제할 수 있도록 하면서 이를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국민은 이를 민주주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유신체제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거세어지고, 학생들은 민주청년학생연합(민청학련)을 조직하여 전국적 연대투쟁을 벌였고, 언론인들도 자유언론수호투위를 결성하는 등 저항의 강도를 높였다.
유신체제가 출범하자 북한은 1973년 8월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하여, 남북관계는 경색되고,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공산화에 자극되어, 정부는 학도호국단, 민방위대를 설치하는 등 군사통치를 한층 강화하였다.
1978년 7월 박대통령은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해 10월 취임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의 득표율이 여당인 공화당의 득표율을 앞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민심을 감안하여 여당에서 이탈자가 속출하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인권탄압을 비판하는 목소리로 더 이상 권력유지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무렵 불어닥친 제2 국제 원유값폭등 (오일쇼크) 으로 인한 경제불황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1979년 5월 말 신민당 당수로 선출된 김영삼총재가 적극적인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자, 국회는 10월 그를 제명조치 하였다. 이 사건으로 국내여론의 비난이 거세어지고, 부산과 마산 등에서 시작된 저항운동(부마사태)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정부는 국민의 저항에 굴복하느냐, 아니면 군대를 풀어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느냐의 갈림길에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0월 26일 궁정동 만찬장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하여 대통령은 저격 당하여 숨지고 박정희시대는 18년 만에 종말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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