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6-19 12:10:14

 

중학교 다니는 한 학생에게 에게 물어봤다. 국어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인데 무엇이 제일 어렵냐고 물어 보았다. 쓰기가 어렵다고 대답했다. 디국에서 글을 쓰는 40대 논객에게 똑 같은 질문을 했다. 그는 듣기가 제일 어렵다 말했다. 곰곰히 생각하면 무엇하나 쉬운 것이 없고 제대로 하자면, 한결같이 어렵다는 생각이다. 최근 디국에서 글을 쓰고, 댓 글을 달다가 여러 번 곤욕을 치루었다. 생각보다 많은 량의 글을 써야 했고, 댓 글도 달아주어야 한다 생각한 것이 지나친 욕심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작업량은 과중한데, 내 의도를 읽으려 하지 아니하고, 나와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말꼬투리를 잡으려 하는 것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글을 쓰는 것은 쓰기인데 댓글 다는 것은 말하기와 쓰기의 형태가 뒤섞인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란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은 느낌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해서, 인터넷 채팅으로 여겨지는 댓글을 다는 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문제점을 정리하고, 보다 원활한 대화의 방식을 모색해 보려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쓴이가 어떤 주장을 하면 그 문제점을 찾아내어, 이를 비판하고 논의하는 것이 댓글 방식의 대화의 중심을 이룬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싸워 이기겠다는 의도로 댓글을 단다. 나는 이 자체가 잘못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어떤 사람의 주장이 자신과 다르면 질문하여 이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토론과 논의의 주안점은 자신이 주장이 남의 그것보다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와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과의 논의를 통하여,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공동의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보다 말이 잘 통하는 사회로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이해하고 협력하며 화해하는 문화적 풍토를 가꾸어 가는데 있다고 믿는다.

 

 

하나의 글은 독자 개개인의 기호나 관심, 취향을 겨냥하지 않고 쓰여진다.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 의도하는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쓰여진다. 최근 내가 쓴 글들은 우리사회에서 정치적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정치적 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결정과정에서의 문제를 지적하고, 그들의 결정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겼고, 정책결정에 참여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이나 정부의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의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의도로 글을 써 왔다.

 

 

이러한 나의 태도에 몹시 거부감을 표시하는 몇몇 독자의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분명히 밝힐 것이 있다. 나는 독자들의 환심을 사거나 인기를 얻고자 글을 쓰지 않는다. 내가 어떠한 스타일로 어떤 글을 쓰느냐의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자유의 영역이다. 물론 어떤 분이 성실하게, 나의 문제점을 지적하여주고 개선책을 제시해 주신다면 더 할 나위 없는 고마움으로 독자들의 충고와 그 기대를 충족해 드리기 위해 가능한 노력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견해가 자신들의 견해와 다르다 하여, 또 내 글의 스타일이나 말하는 방식에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안는다 하여, 시비거는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 시간을 허비하여 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말해 주고 싶다.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삶의 평가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개인적인 신념으로 사회발전에 기대하려는 의도로 글을 쓴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문제에 대하여,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성실하게 글을 쓰는 것이 내가 가장 효과적으로 세상에 기여하는 방식이라 믿기 때문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체험에 대한 이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가능한 의미체계로 만들어 형상화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공적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작가라면 자신만의 문체(Style)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말하기란 자신의 의도하는 바를,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오해로, 전달할 때 가능하다. 작가가 논리적으로 통일된 자신의 표현기법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대응방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Style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일을 갖는다는 것은 모든 예술의 분야에서 성공적인 예술적 형상화의 전제가 된다. 작가가 自信을 갖고 작업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세계관에 기초한 이러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좋은 작품은 작품 내부에 통일된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스타일의 문제는 단지 예술의 영역에서 만이 논의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자신의 옷차림이나 화장이나 액세서리등의 조화된 이미지로 코다네이션할 수 있는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것은 그녀에게 그녀 나름의 스타일을 소화하고 연출할 능력을 가진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매력적인 성격이나, 사람을 대할 때의 예의 바른 태도 또한 스타일과 관련되어 있다.

 

 

예의 바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이다. 예의란 나의 주장을 내세우려는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자세이다,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상대방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상대방에 대한 미리 예단하지 아니하고,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몇 마디 말이나 몇 가지 행동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애정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고,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보다 많이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 이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의도는 이렇게 이해됩니다. 내가 당신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한 방법을 당신이 찾도록 도와주실 수 없는가 하는 식의 상호존중의 방식의 인간관계에서의 신뢰의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성공적인 말하기란 자기 자신의 신념체계를 자신과 다른 신념체계를 가지고 사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하여, 자신의 견해를 바로잡고 보다 발전되고 개선된 삶의 방식을 이해하는데 있다. 그러하기에 성공적인 대화와 성공적인 인간관계는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업그래이드 하는 계기를 만든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만나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방식의 삶을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개선의 가능성과 만난다는 것을 훨씬 더 유익하고 즐거운 일이 될 수 있다.

 

 

배운다는 것은 때론 스스로 열등감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우리의 삶에서 차지하는 나아가 우리의 문화발전을 위해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에서 반성적 지성, 깨어 있는 의식이 갖는 중요성을 보다 바르게 인식하길 기대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가장 좌절하고 가장 고통스러워할 때, 나의 의식은 가장 치열했고 그러한 고통을 통하여 성장해왔음을 기억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드높은 자존심은 부족함을 고치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한다. 나아가 반성이 고차원으로 올라가면 즐거움이 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탐구를 통하여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는 폭은 향상된다. 오랫동안 지시와 하달만이 있고, 이의 제기나 질문이, 상사에 대한 괘씸죄로 비난 받는 그릇된 문화풍토에 살아오면서, 질문할 줄 모르는 것이 우리의 문화풍토이다. 지난 십 수년 민주화 과정이 자신과의 반대의 견해에 떼를 쓰고 돌을 던지는 그릇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에서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대화의 문화, 토론의 문화는 싹을 피우지 못했다. 무엇보다 인간존중의 문화적 토양이 갖추어져야 만이 민주주의는 꽃피울 수 있다. 너 나 할 것이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했음을 반성해야 할 싯점이라 믿는다. 인간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듯이, 남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내 스스로의 삶을 반성적으로 되돌아 보며 배워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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