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적 도덕적 가치

2004-06-22 10:22:32

 

스스로 사회를 판단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의 의무-우리가 침묵을 지키면, 과연 누가 말할 것인가..

- Arthur Schopenhauer -

 

 

노대통령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쓰다 체험한 일이다.

 

내가 쓴 글을 며칠 동안 쫓아다니며, 나를 존경한다며, 나 같은 사람이 노통을 지지해야 대한민국이 발전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 입장에서 노통을 비판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해 바람직하다 생각한다 말했다. 그는 자신도 노통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하여 내가 노통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노통을 지지하고, 나는 나대로 노통의 문제점을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고 말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존중해 주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설명했다. 그는 내게 다시말했다. 노통을 지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존경하니, 정책을 개발하여 노통에 협조해 주는 것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좋다고 말했다. 말이 이쯤 되니까 난 열통이 터지고 희롱을 당한다 생각하며 화가 났다. 당신 미친놈 아니냐고, 노통을 대한민국의 구세주로 생각하는.그러자 그는 나를 교만이 극에 달한 인간이라 비난했다. 이런 식으로 몇 번 부닥치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는 진심으로 날 존경한다 말했었다.

 

누구에게 존경받는다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듣기 거북한 소리가 없다. 나는 평생을 거의 내맘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내게 기대한다든지 존경한다는 소리가 얼마나 부담스럽고 귀찮은 것이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경한다는 소리가 순식간에 실망으로 변하는 것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냥 실망도 아닌 뼈저린 실망이란 말을 들을 때면, 날 얼마나 존경했기 내 못난 모습이 상처까지 되었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부족하고 모자란 것 투성이인 내게 어쩌다 콤플렉스를 느끼다, 악의에 찬 욕을 그처럼 미숙하게 하는가 싶기도 하여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나는 존경도 실망도 사절하고 싶다. 나를 아끼는 애정으로 좋은 점이 오해될까 염려해 주시는 분들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들의 기대만큼 좋은 점만으로 날 포장하고 사는 것을 잘 하지 못하니 내 생긴 꼴대로 살아가면서, 내가 좋다고 생각하고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은 조금씩 배우면서 살아간다.

 

 

나는 이러한 존경과 실망, 그리고 질투와 시기에 찬 비난 이러한 것들이 모두 나에 대한 무례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나에 대한 태도는 부도덕하다. 내가 그들을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그들을 비난함이 아니라 그들이 나의 도덕적 가치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내게서 좋은 점을 보면, 그 좋은 점으로 나라는 사람을 상상하고 내가 모든 점에서 자신들이 상상하는 인간이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비난을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내가 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나는 그들이 나와 같지 않다고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게 그들과의 정서적 일치감을 요구한다. 쉽게 말하면 내가 그들보다 낫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보이면 질투심을 느끼다, 아니다 싶으면 비난하고 왕따를 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나를 비난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자신들이 옳다고 여긴다 하여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정서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으로 호도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왕따의 심리적 기저이며, 저질 포퓰리즘의 심리적 기저를 이룬다. 독창적이고 자기창조적인 삶을 살거나, 아이덴티디가 확립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개성적인 인격으로 살아가고자 하기에 포퓰리즘에 대하여 거부적이다. 반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삶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른 사람과의 동질감을 공유함으로써, 자기 삶의 보편적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개인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다중의 위력으로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다수의 의사가 곧 진리고 정의라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국가나 사회도 이러한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한 다수의 욕망에 의하여 움직여진다. 이러한 사회에 미래가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 노대통령의 집권전략은 열등감에 대한 다중의 공통의 정서를 공유하면서 이를 시민혁명이라 이름 부친다. 이런 국가에 비젼이 있겠는가? 당연히 없다. 이러한 포퓰리즘으로 이끌리는 나라에 신념이 어디 있고, 원칙이 어디있고, 신뢰가 어디 있겠는가? 시시 때때로 변하는 다중의 변덕에 세상은 우왕 좌왕하는 것이 필연적인 귀결이다. 노통에게 정치의 고수라는 헛소문이 전염병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열등감과 콤플렉스로 정체성을 확립치 못한 인간들이 군락을 이루어 집단행동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 주소이다.

 

 

인간관계에서 도덕적 가치관이 드러나게 된다. 상대방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일을, 또는 상대방이 바라지 않는 일을 자신이 옳다고 하여 상대방에게 요구하거나, 자신의 판단으로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며 일을 행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일은 <상대방에 좋은 일이다>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독단이다. 그리고 자신의 독단으로 상대방에 연관된 행위를 하는 것은 마땅히 부도덕하다. 부모가 자식을 욕심으로 키우면 이러한 짓을 자식에게 반복적으로 행하게 되고, 아이가 성장하면 이러한 부모 자식과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악화된다. 그것이 선행이라 할지라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부도덕하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도덕은 한 사람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개성을 존중하는 일이다. 인간이 누군가에 의해 자기 목적에 맞도록 가치관이 맞춰 조작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독재정치는 독재자의 욕망에 국민의 욕망이 종속되기를 강요받는 정치체제이다. 이러한 사회체제에서 자율적인 인간과 개성적인 인간은 배제된다. 인간은 각자의 권리와 독자적인 가치관을 지닌 독립적인 존재이다. 설득하는 것은 좋지만, 강요하거나 위협하고, 하물며 세뇌 따위는 결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사회관계에서 기본적 도덕이 되어야 한다.

 

 

지난 17년 민주화 과정 동안 우리사회의 도덕적 환경은 매우 악화되었다. 범죄의 증가, 수많은 신용불량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도층의 부정부패, 각종 대형사고 빈발, 청소년 문제, 자살, 이혼율의 급증 등 사회가 그야말로 난장판으로 치닫고 있다. 규율되지 않고 지배되니 않는 사회, 국민 도덕심이 황폐화된 병든 사회가 우리 사회의 현주소가 아닌가?

 

 

왜 이처럼 도덕심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많은 이유 중 가장 중요한 한 이유로 나는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지도원리가 변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민주화 과정은 개인의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해 개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형태로 진행되어 왔기에, 우리사회가 개인의 책임을 존중하는 사회로부터, 사회의 책임을 중시하는 사회로, 아니 모든 문제의 책임을 사회 탓으로만 돌리기까지 하는 잘못된 세상풍토로 변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개인이 자기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않고 모든 문제의 책임이 사회에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이러한 개인들은 자기의 행동을 삼가는 일 따위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17년 간의 민주화 과정은 개인의 사회적 책임과 규범의식이 실종되어가는 쪽으로 진행되어왔다. 개인의 자발성이 상실되었고, 상호존중과 이해의 노력은 실종되고, 개인과 집단의 당파적 이익만의 소리 높이 외쳐되어 왔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의 원리는 개인의 자발성과 상호존중을 통한 협력을 전제로 작동된다. 시장을 기초로 움직이는 사회란, 강제가 없는 협력으로 이루어진 사회이며, 자발적인 교환이 이루어지는 사회이고, 자유로운 기업의 활동이 보장되는 사회이다. 시장의 본질적인 성격은 자발적인 교환에 기초하고 있다. <내가 적절한 대가만 지불한다면 당신이 무엇인가 나에게 팔아준다>는 합의에 기초한다. 그리고 그 같은 합의의 이면에는, 그 교환에 참가하는 당사자가 다 같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하고자 한 핵심 내용도 이것이다. <독립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상호 이익이 되는 것을 교환하고, 이로써 사회 전체의 이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발성에 기초한 개인의 상호존중이 전체 사회의 이익에 부응한다는 것을 스미스는 말하고자 했다.

 

 

흔히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물질편중을 지적한다. 돈을 벌려는 노력은 분명히 도덕적으로 칭찬받을 동기라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건전한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에 있어 적어도 <떳떳한> 행위라는 사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시장에 기초한 사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 자유로운 거래를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선행은 좀처럼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을 설득해야 하고 사람을 설득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가 책을 한 권을 써서, 독자에게 한 문장을 각인 시키면 그 작가는 성공한 것이라 생각한다. 설득을 해야하기에 선행을 하기도 어렵지만, 신뢰를 상실하면 곧바로 손해를 보는 사회이기에 동시에 악한 일도 하기가 아주 어려운 사회이다.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는 사람이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만능의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나, 소득 2만불 시대의 달성에만 전력을 기울이는 사회이기에, 인류의 정신적 업적이나 가치를 서슴없이 짓밟아 버리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는 평균적인 인간 다같이 소수파를 억압하는 사회이다. J.S. 밀은 자유론에서, 전 인류가 동일한 의견을 가지고 있고, 단 한 사람만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할 때, 전 인류가 그 한 사람에게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은, 그 한 사람이 권력을 잡았을 때 전 인류에게 침묵하도록 요구하는 것만큼 부당하다고 말했었다.

 

우리사회가 인도적이고, 또한 소수의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위대한 정신활동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이외에 창조적 정신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여 주어야 한다. 그것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창조적인 소수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하여 발전되어 왔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사회가 지니고 있는 평균적 인간보다 우수한 인간에 대하여, 이를 지원하고 응원하기는 고사하고, 열등감에 뒤범벅이 되어, 자신들과 이질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이들을 왕따시키려 하는 사회가 부끄러운 우리 사회의 현 주소이다. 나는 이러한 사회의 편견과 맞서, 30년 이상을 싸워왔다. 내 삶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나의 노력이 나와 같은 삶을 살아가려는 후학들에게, 보다 덜 어려운 삶을 가게 할 수 있는 길라잡이 노릇을 했으면 그것으로 나의 역할은 충분하다 믿는다. 적어도 30년 이상을 실패만 거듭해 왔다. 그러기에 난 실패에 대하여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한다. 진실은 오히려 실수에서 잘 드러난다.

 

 

고통받고 소외받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강자는 실패를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어려운 시기를 흔들림 없이 헤쳐나아가야 한다.

훗날 우리가 지금 건너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이

보다 나은 삶의 계기와 밑거름이 되게 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 아닌 우리 자신과의 이 처절한 싸움에서

기필코 승리해야 한다.

 

나는 안다 그리고

끝내는 우리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고통의 날들을 쓰러지지 않고 건너온 사람만이

그 어떤 패배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끝내는 일어서고야 마는 정신만이

약속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고

절망과 고통의 세월을 뛰어넘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희망과 사랑의 빛이 되는

정신이라는 것을..

 

정녕,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물려 줄

가장 값진 유산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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